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 1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 천명관의 『고래』는 현대소설로서는 보기 드물게 거대하고 웅장하고 치밀하다. 이야기의 둘레 자체가 굵직하고 크다. 시간의 흐름은 지극하고 멀고 아득한데다 인간군상에 대한 묘사가 꼼꼼하고 캐릭터가 다양하고 무궁하다. 어느 한 명 그저 스쳐가는 사람이 없이 벌집처럼, 하나의 직물처럼 질리도록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혈연관계는 아니어도 3대를 거쳐 이어지는 3명의 (드물게) 여성의 역사가 오롯이 함축된 대하소설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감히 비교하자면- 박경리, 조정래, 최명희 등의 선생님들께서 쓴 혹은 쓸법한 장대한 소설의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과서에 나올법한, 고전이라 불려도 될만한 옛스러운 소재와 방법을 선택한 것도 놀랍다. 이것이 갓 등단한 첫 장편소설을 쓴 신인작가의 글이라는 것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개인적으로 꼽은 이 글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웅장함이나 대범함이 아니다.  

 

* 세상에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다.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고 누군가 반발한다면 뭐 그렇지요 할 수 밖에 없지만 어쨌든 세상에는 두 가지 재능을 나눠 갖는 사람이 더 많다. 개그맨들의 학창시절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이기도 한데, 기막히게 말솜씨가 좋고 좌중을 휘어잡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마 학창시절에 반에 한 명쯤 있는 친구들,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이나 노래, 그도 아니면 끝내주는 말빨로 인기를 몰고 다니던 사람들 말이다. 그 친구가 이야기하면 작은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 헐리웃에서 100억 투자한 블록버스터가 되고, 뻔한 사랑이야기도 다시 없을 세기의 로맨스가 되고 그저 피식 웃고 말 일이 까르르 웃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 달변가 중에 의외로 필사적인 노력가들이 많다고도 하지만, 어쨌든 이건 '재능'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굉장히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설가가,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꾼이 한 명 있다.   

 

*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인생은 없음을 입증하듯 <고래>에는 온갖 사연이 넘쳐난다. 어쩌면 이렇게도 다양한 사연들이 한 곳에 오밀조밀 모여있는지 기가 찰 정도로 별의별 사람들이 등장한다. 재밌는 점은 그들 대부분은 이름이 없다. 생선장수, 노파, 약장수, 쌍둥이자매, 칼자국, 포주, 청산가리, 트럭 운전사 등등. 이름이 있는 사람을 꼽는 쪽이 오히려 빠를 정도다. 금복, 춘희, 걱정, 文(문은 그 자신의 숭고함을 표현하듯 한자로 -그것도 하필 이름은 文이다- 나타난다), 수련, 점보 정도일까. 이 복작복작하고 시끌시끌한 사연들을 정렬하는 사람은 당연히 작가다. 그는 또 한 번 대담함을 발휘해 처음부터 끝까지 구어체를 사용한다. 400페이지를 훌쩍 넘는 페이지동안 줄곧 구어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처음에야 집중력도 높아지고 독특하게 읽혀지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 다소 산만해질수도 있고 말투가 거슬릴수도 있으며 옆에서 누군가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것처럼 느껴져서 짜증이 날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작가는 능수능란하게 구어체의 위력을 발휘한다. 한 권의 책, 하나의 픽션, 길고 지리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삼삼오오 모인 와중에 소식 빠르고 오지랖 넓은 이들이 쑥덕이는 것처럼 들린다. 빨래터에 앉아 수다를 떠는 아낙네들처럼, 담배 한대를 피우며 휴식을 즐기는 인부들처럼, 풍문처럼 나도는 '카더라 통신'처럼.

혹시 (일명) 약장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호객행위를 본 적이 있는가? 젊은 사람들 특히 그 중에서도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들의 대개 귀담아 듣지 않고 휘말릴리도 만무하지만, 그래도 가만가만 들어보면 세상만사 이런 구경거리가 없다. 그들이 하는 말에 대한 묘한 설득력, 음의 고저와 강약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말투의 리듬감, 결국 귀를 열게 되고 때로는 지갑을 열게 되는 묘한 흡인력. 일류 세일즈맨은 고객 스스로가 기꺼이 이익을 얻으며 구매를 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들은 1.5류 세일즈맨 정도는 쳐줘야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천명관은 바로 이 약장수들처럼 그리고 그래, -옛날에 존재했다던 독특한 직종!- 변사처럼 이야기한다. 고루해질수도 있는 이야기의 탄력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이 '말의 힘'인데, 이쯤 되면 작가를 달필가나 문장가가 아닌 달변가 혹은 웅변가로 불러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얼마나 시치미를 뚝 떼고 재밌게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여자가 남자가 되고, 고래가 뛰고 코끼리가 산책해도 뭐 그럴수도 있겠지 허허 하게 된다. 정말이지 놀라운 이야기꾼이 아닌가.  

 

* '고래'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피노키오를 삼킨 고래와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일 것이다(끼루룩거리는 귀여운 돌고래와 그들의 쇼는 제외하자).  하지만 이제는 이 책을 함께 떠올리게 될 것 같다. 피노키오가 갇혔던 고래 뱃 속의 묘한 불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늑함을 이 책은 닮아있다. 그야말로 거룩하고 숭고한 태동(太動)으로 고요하게 바다를 헤엄치는 한 머리의 조아한 고래 같은 글이 아닐 수 없다. 

 

 

덧)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작가는 이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까? 이름을 짓는 것도 얼마나 수고스러울까? 인물관계도나 혈연관계를 그려가며 글을 쓰지 않을까? 그래서 천명관은 아예 이름을 짓지 않은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기 활동 종료 페이퍼

 

1. 신간평가단 활동하면서 좋았던 책 Best3 

 

 

 

 

 

 


 

폴 오스터, <보이지 않는> / 카렐 차페크, <도롱뇽과의 전쟁> / 제스 월터,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 폴 오스터는 내게 쪼개진 쿠키 같았다. 초코칩의 토핑과 바삭함, 혹은 버터향 따위로 기억을 더듬을 뿐 완전한 모습의 그것은 떠올리기가 어려운 느낌의 초코칩쿠키. <보이지 않는>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는 만들어낸 불성실과 선입견으로 장님 코끼리 만지듯 그를 내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로서의 완벽함이나 글의 우수성과는 차치하고, 이토록 많은 이야기 혹은 많은 함의를 짐작하게 한 책을 최근에 만나본 적이 없다. 기대하지 않았던 수작이었다. 무엇보다 늘 조각난 부분만 먹었던 폴 오스터식 쿠키를 오롯이 먹게 되어 흐뭇하다.

- 뱀에 대한 엄청난 공포심을 가진 나로써는 이 책이 신간평가단에게 선택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정말이다). 도롱뇽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운데 도롱뇽과 전쟁까지 벌어야한다니. 머릿속이 아득했다(내가 로맹 가리의 <그로칼랭>을 왜 못 읽었는지 아는 자는 이 두려움을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정말이지 굉장하다. 문장과 발상, 소설로서의 지향점과 편집과 구성까지. 반드시 소장하고픈, 그리고 읽어야 할 책이었다.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희망한 신간평가단 분들의 혜안과 신간평가단 운영자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때, 마음 속으로 원망해서 죄송했습니다.

- 좋아하는 것, 혹은 싫어하는 것을 하나만 고르라는 물음은 싫다. 기실 이 질문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택하는 게 아니라 나머지를 모두 버리라는 것으로 들리니까. 때문에 세 권을 꼽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12권 중 가장 좋았던 세 권을 뽑은 것이 아니라, 의외의 만남과 그 만남에 감사하는 의미로 고를 것이라고. 그 취지에 가장 충실한 책이다,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아마 신간평가단 활동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않았을?- 책이다. 그러나 신간평가단 덕분에 이렇게 만났고 나는 이 책에 꽤 공명했다.   

 

2. 향후 신간 평가단에 건의하고 싶은 이야기  

- 워낙 꼼꼼히 친절하게 공지해주시구, 늘 애쓰시는 걸 알기 때문에 딱히 보완점이나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 높은 경쟁률을 뚫고 두 번이나 뽑아 주신데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웃음). 다만 책이 차츰 더 늦어진다는 점이 조금 난감합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점점 늦어지면서 달(月)의 의미가 모호해져갑니다. 물론 리스트 취합하고 출판사와 연계 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주 조금만 더 빨리 책을 결정하고 보내주시면 더욱 수월할 것 같습니다(추천 페이퍼 받는 것도 정확히 1일부터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늘 모든 점에 감사드리고 이번에도 즐겁게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게다가 매번 좋은 책들을 선별해주시는 탁월한 안목을 가진 함께 활동한 신간평가단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가을에 만나 겨울을 지나 봄꽃이 피는 것을 함께 보네요. 소중한 봄, 여름도 잘 부탁드립니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라딘신간평가단 2011-04-1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원망하셨었군요 ㅜㅜ 그래도 좋은 책이었다니 다행입니다! 이번 기수부터는 추천 페이퍼 작성 기간을 좀 줄이고 보내는 일을 좀 당겼어요. 좀 더 신속하게 드릴 수 있도록 더 애쓸게요~~ 봄꽃이 피는 걸 함께 보게 되어 기쁩니다~ 그간 좋은 활동 감사드려요!

Shining 2011-04-15 17:58   좋아요 0 | URL
넵, 실은 원망했어요ㅠ 파충류는 무서워요ㅠ 하지만 '올해의 발견'이라 타이틀을 붙여도
될만큼 굉장하더라구요!

열심히 애쓰신거 아니까, 혹여 기분 나쁘게 듣지 않으시면 좋겠어요ㅠ 처음 시작할 땐 15일쯤
책을 받는구나 생각했는데, 점점 희미해져서; 제가 헷갈려서 그랬어요^^; 저야말로 항상 감사드립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 1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