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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팠다. 아니 아직 아프다. 근 2년 간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뿌듯하군, 싶더니 한 번에 왔다. 38. 2도의 열을 안고 일을 하러 갔다. 나는야 어른(유사 표현으로는 목구멍이 포도청, 이 있겠다). 토요일 밤, 잠들기 전 39.3도.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응급실에 가야겠다, 고 생각하며 도롱이벌레처럼 웅숭그리고 잠든다. 주말 이틀동안 마흔 시간 가까이 잤다. 깨있는 시간마저 사실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절한 것처럼 자다가 가끔 낑낑댔다. 기침과 코막힘과 열보다 괴로운건 두통과 이명. 왼쪽 귓속이 꽁꽁 부은 것처럼 아파서 깜빡 울 뻔했다. 며칠 간 잠만 자댔는데도 껄끄럽고 푸석하다.
몇 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너는 혼자 살면 반드시 고독사 할 거라며 혀를 차며 친구가 왔었다. 죽과 약을 사와선, 이마를 짚으며 미련도 병이라며, 미친 짓이라고 온통 심한 말을 쏟아내며 화를 냈다. 그때까지 나는, 아픈 줄 몰랐다. 그냥 세상이 좀 덥구나, 기침이 나오는군, 싶었는데 전화를 받는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걸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들켰고, 달려왔다. 친구가 재본 내 열은 39.8도 였단다. 잘 참는다, 아픔도 제법 잘 견디고, 징징대지 않는다, 가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씩 너무 오래 참았구나 머쓱해질 때가 있다.
아프다는 말을 하는게 그렇게 힘들까. 아무도 모르게 아프고 아무도 모르게 낫고 싶었다, 늘. 나는 가장 온건한 사람이길 바랐고, 심리적으로 약해졌을 땐 더더욱 아프지 않으려 필사의 노력을 했고 그래도 아플 땐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아플만해서 아프다, 는 연민이 고집스럽게 싫었다. 마음의 문제가 곧바로 몸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인과관계를 지적당한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손에 자주 생채기가 나고, 손목이 붓고, 파상풍 주사를 맞으러 가야할만큼 깊게 다치는, '다치는' 일은 막을 수가 없었지만 통증을 감춘다. 늘 상대방보다 잘 참아야한다는 일말의 책임감 때문에 마치 남을 받드는 것처럼 면밀히 건강을 살폈다.
아팠다. 아니 아직은 조금 아프다. 그러나 열이 많이 내려 휘청거리지 않고 알싸하지도 않으며, 말도 할 만 하다. 미련도 이만하면 병, 이라는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아픔도 지나가기 전까지 타인에게 고하지 않는 것이 버릇 아닌 버릇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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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글을 안 쓴 건 당연히 아니다. 컨디션 난조와 본격적인 감기는 넉넉히 봐줘야 일주일. 그렇다면 약 3주 간 뭘했을까? 글쎄, 내가 더 궁금하다. 평온했다. 차근차근 여름옷을 정리하고 스카프와 윈드브레이커를 꺼냈다. 선풍기 날개를 씻어서 말리고 다시 조립해 덮개를 씌웠고 샌들과 슬리퍼를 정리해서 박스에 넣었다. 이런저런 생일 선물을 받기도 했으며 명절도 지났고 가볍게 기차여행도 다녀왔다.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내일같은, 실제로 그렇게 바꿔 기억을 해도 별 탈이 없는 날들이었다. 날씨가 몹시 좋았고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고 그러나 심란해하지 않고 제법 책도 읽었다. 알라딘에는 이웃들의 소식이 궁금해 가끔 들어왔고 몰래 인사를 남겼다. 그런데도 글은 쓸수가 없어서. 막막해서 마침내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결핍이 있는 자만이 무언가를 갈구한다, 고 말한 이는 나였는데. 내 안에는 결핍이 없던걸까, 그 결핍을 모색할 번민이 없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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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는 동어반복의 글쓰기를 한다.
내적으로는 자문과 부정을 통한 문장의 외형이 그러하고 외적으로는 유사한 소재들의 반복이 그러하다. 마을의 수재였던 청년, 고시공부를 했던 남자,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아들, 광에 갇힌 청년, 종교적 색채와 번민, 부정 등. 구조는, 서사는, 때로 주제는 반복된다.
대부분의 경우, 동어반복은 부정적인 면으로 지적된다. 누구는 한계라 할 테고 누구는 지겹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김훈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의 사고의 폭이 한정적이라 평하는 이도 있고, 그의 문체는 매력적이나 때론 문체가 사유를 제약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문제의식이 반복된다는 평도 있었고, 에세이의 문장과 소설의 문장이 같은 태도에서 그릇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승우의 동어반복은 김훈의 것과 닮고도 다르다. 그는 '애초 모든 소설은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다른 책에서- 말하며 자전적 소설임을 구태여 감추지 않고, 배경이나 상황이 시공간을 초월하지도 않는다. 김훈의 문장이 초고도로 집적 된 문장의 정수라면, 이승우의 문장은 이러하다.
그렇게 해야 했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온다는 걸 안다. 그 순간이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온다는 것도.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대개 어떤 이유로든 그렇게 할 수 없게 된 순간이다. 그렇게 할 수 없게 된 순간에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깨달음이다. - 이승우, 칼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사랑에서 획득한, 혹은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세뇌당한 무소불위의 권력 때문에 두리번거리지 않고 질주하고(왜냐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은 두려움을 모르니까.) 무모함 속으로 빠져들고, 무모함 속으로 빠져들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왜나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은 반추와 성찰을 모르니까.) 뒤늦게 인식하고도 멈추지 못한다.(왜냐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은 패배를 모르니까.)
(젼략) 장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지 어떤지는 그 말고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렇든 아무렇지 않든 그는 오랫동안 그 표정만 짓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얼굴이 아무렇지 않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지은 표정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아도 짓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아도 지을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 이승우, 지상의 노래
그는 원인과 결과를 구태여 규명한다. 원인 뒤 결과를 내비치지만 반드시 결과의 원인이 그것이 아닐수도 있다고 말한다. A의 결과는 B라고 말하더니 반드시 B의 원인이 A는 아니라고 하며 B의 원인이 C일수도 있지 않냐고 하더니 그렇다면 A의 결과도 D일수 있다고 하는 식이다. 또는 자신의 사고의 과정을 해명하거나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의 표현 -마지막 문단의 경우 '아무렇지 않은'- 으로 말장난을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문다.
처음 그의 문장을 읽고 아찔했다. 몸통 외에 모든 것을 잘라내고 필요한 수식을 걷어내고, 그렇게 명료하고 단순하게 쓰는 것이 잘 쓴 문장이라고 생각해 왔더랬다. 김훈의 문장은, 수식이 짧고 간결했지만 필수불가결한 요소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헌데 이승우의 문장은 길고 복잡하다. 헌데 난해하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으며 문장의 깊이를 강화한다. 아마도 그 외에 누구도 이런 식으로 이렇게 이렇게까지 잘 쓰지는 못하리라, 혀를 끌끌 찬다.
개인적으로 그의 단편이 장편보다 더 밀도있게 느껴지는 건 아마 이런 동어반복의 서사와 문체 때문이 아닐까. 때문에 『지상의 노래』가 그의 다른 단편보다 혹은 이승우의 -내가 읽은- 모든 책 중 가장 뛰어나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 책엔, 그 외엔 아마 누구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다. 소재, 서사, 문장, 사유. 그것들이 혹 동어반복으로 읽힐지라도 나는 그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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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는, 맨발로 거리를 달리는 테레즈에게 로랑이 구두를 신겨주는 장면입니다. 두 인물이 재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 구두가 툭 하고 떨어지면서 영화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구두로 시작해서 구두로 끝나는 영화가 아닐까. -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식후 소화도 되지 않은 채 들어간 영화관에서 일행과 나는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며 영화 <박쥐>를 봤다. 전혀 무섭거나 징그럽지는 않았는데, 피를 빠는 '쪽쪽'거리는 소리의 리얼리티가 귓속으로 끊임없이 안착해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었다.
나 역시 그 장면을 기억한다. 맨발로 뛰는 것 외엔 돌파구가 없었던 태주(김옥빈)의 창백한 발에 신기던 무릎 꿇은 상현(송강호). 그 장면이 애틋하기보단 저릿했던 건, 그 다음에 올 파국의 드라마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
하릴없이 또 한 켤레의 구두가 떠오른다. <아이 엠 러브>. 이 아름답고 빈틈없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명징하다. 첫 장면, 엠마의 남편은 엠마에게 온갖 액세서리를 채워준다. 마치 인형을 꾸미는 것처럼, 무엇도 허용하지 않는 듯, 물건을 대하는 것 마냥. 마지막 장면, 남편은 엠마를 구두로 데려간다. 확신한다. 엠마는 거기서 그 말을 할 결심을 했을 것이라. 구두를 들고 사람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사람을 구두로 끌고 가는 남자. 그녀는 하나의 소품이었고 구두를 신을 예쁘고 우아한 인형이었구나. 그 말 후, 남편은 엠마의 어깨에 걸쳐 준 수트를 다시 벗겨간다. 이제 필요없어진 인형에게서 옷을 도로 벗겨가듯이. 그리고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아아, (내가 이제 이 옷을 벗겼으니, 구두를 벗어던지고 머리카락을 자른) 당신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이구나.
덩그마니 놓여있던 구두, 감정이 차오르는 엠마와 사람을 구두로 데려가는 남자. 이 영화가 눈부신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일관되게 표현하는 감정, 우아한 표현, 기가 막힌 카메라와 정교하고 집적된 표현 방식. 다시 생각해도 멋지고 슬픈 장면. 한 켤레의 구두로 남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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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친척이라는 명목으로, 더 무섭게는 너를, 네 부모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며 충고한다. 별로 어른스럽지 않은 어른도 어른다움에 대해 충고하고, 증오와 폭력의 결혼생활을 하는 이들도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고 충고하며, 자식과 갈라선 이들도 그래도 남는 건 가족밖에 없다고 충고한다. "내가 살아보니까"로 시작해 이런 직장에 다녀라, 결혼은 이런 사람과 해라, 지금부터 결혼을 생각해야한다, 이렇게 살아야한다, 저렇게 하지 말아라, 라는 충고대회라도 되는 듯한 이야기들을 계속 듣다보면 외려 반발심이 생기고 조소하거나 고소한다. 가끔 이 모든 것이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징그럽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막돼먹은 사람일까, 아님 아직도 이런 일에 분개하는 어린애일까.
세상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고 때문에 경험도, 충고도, 지혜도 일반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런 삶을 살았다해서 너의 삶도 그럴 것이라 말할 수 없으며, 나는 그렇게 했으니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고생하는 게 안 되보이고 그래서 자신의 노하우(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 십분 이해한다. 그렇지만 인생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백 명의 사람에겐 백 개의 삶이 있고, 백 개의 삶은 일정하게 해석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승우의 문장처럼 A의 결과 B가 생성될수도 있지만 B의 원인이 반드시 A는 아니며 A의 답 또한 C나 D, E, F등이 될 수 있고(실제로 더 많은 경우의 수가 있을테고) 그렇다면 B의 원인도 G나 H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어떤 것도 인과관계를 명확히 할 수 없는 게 삶의 불가피한 부분 아닐까.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것으로만 사람이 되어가는 존재다. 당신의 당신 삶으로서 가치를 선택한 것처럼 나 역시 내 삶으로서 가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등에 짊어진 짐은 누가 대신 들어줄수도 줄여줄 수도 없으며, 무엇을 선택해서 어떤 답을 얻든지 그건 그의 몫. 다 괜찮아 질거라는 헛된 희망도,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다는 훈계도, 모두가 다 그런 시절을 지나왔다는 냉소도 필요치 않다. 아아, 누구도 함부로 충고하지 않았으면 한다. 동일한 이유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조언하거나 충고하고 싶지 않다, 감히.
하지만 어쩌면 이런 단호한 표현, 충고하지 말라는,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경험론자라는 나의 생각 역시 누군가에게는 주장 더 나아가 충고로 들릴지 모른다. 그저 개인의 경험에서 얻어진 파편일 뿐인데, 내가 획득한 나의 가치관일 뿐인데. 내 말이 옳다고 교만하게 굴며 내 주장을 긍정하라고 은연 중에 압박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게 나도 모르게 충고하고 있지는 않을까.
충고받지도 충고하지도 않은 삶을 살고 싶다. 유연해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