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들 - Noodl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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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용 선물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또 이스라엘 영화였고, '밴드비지트'와 마찬가지로 다른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의 소통불가능성을 극복하는 것이 영화의 골격이다. 게다가 상처와 갈등, 치유에 이르는 이야기가 심하게 공감간다 했더니, 역시나 여성감독이었다.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기술이 제법 세련됐다 했는데, 의외로 감독의 전공은 다큐멘터리다.  

 강제추방등으로 이주노동자 문제가 이슈화된 2000년대 초의 사회적 분위기와, 중국을 여행하면서 느꼈던 강렬한 소외감이 영화의 계기가 되었단다. 남편과 두번이나 사별을 하고 새로운 인연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도 실제 지인이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꿋꿋히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바오치 첸은 당당히 중국어를 사용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여행작가가 실질적인 통역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각자의 언어로 사용하되, 마음을 열고 대화한다. 누들을 잘 먹는 다는 이유로 누들로 불리는 아이는 삐걱거리는 자매사이를 회복하는데 일조하고, 캐리어에 실린 아이는 언니의 재치로 보안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한다.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가 생각났다. 어설픈 한국어를 구사하는 네팔노동자가 행려병자로 오해를 받고 6년 4개월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된 이야기. 몇몇 주요 언어가 아닌 다음에야 소수언어 대부분은 외계어로 통칭된다. 누들이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누들의 엄마가 순발력을 발휘해 흔적을 남겨놓은 덕분에, 다행히도 해피엔딩이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돌아갈 땅을 잃고, 혼자서 소통장애에 신음할 누들이 보인다. 영화는 그렇게 힘줘서 소통과 치유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다시 선의를 가지고 이야기하자. 'Noodle'의 어원은 라틴어 'Nodus', 매듭에서 왔다고 한다. 얼키고 설켜있는 누들이 흡사 꼬일대로 꼬여서 날카로운 우리의 관계를 닮았다면, 그 매듭을 푸는 열쇠는 뭘까. 혹자는 성급하게 끊어 먹으려던 미라의 가족에게 젓가락을 사용해 훌훌 마시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을 통해 메타포적으로 드러냈다고 했다. 두개의 젓가락을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음식물을 들어올리는 과정이 관계의 미학을 담고 있다는 거다.

 일면 타당성 있는 분석이다. 하지만, 내게는 관계 역시 '의지'와 '배려'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포크를 사용하든, 젓가락을 사용하든, 그들이 함께 누들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표정과 눈짓과 몸짓맘으로 얼마든지 아픈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 소통 가능의 실마리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말인가. 언제나,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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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썩 상관있어 보이진 않는다만.

 중국말도 모르면서, 중국여행을 한다는건, 소외를 너무 작정한거 아니냐구. 때문에 별은 네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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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 Old Partn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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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널한 마음으로 조조시간에 맞춰 동네 영화관을 찾았건만, 왠걸, 남은 좌석 한개를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기대이상의 흥행에 감독도, 출연진도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꽤 많이 보는 편이나, 영화의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비주류'라는 사회적 마이너리티였고, 영화는 단관개봉해서 조기종영하기 일쑤였다. 혜미양이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의 전단지를 보고 관심을 보였을때도, 이건 비주류 다큐멘터리임을 확신했다. 그런데 박스오피스 1위에 290만의 관객이라니, 피와 아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묵묵히 일하는 소와 할아버지가 일하는 기계였다면, 할머니는 극을 이끌어가는 생명력으로 호흡하는 인간다웠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야 어쨌건, 판이 커지고 일이 커질수록,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넘쳤다. 그리고 내게는 일상적으로 들려오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오십대 아주머님은 말하셨다. "워낭소리 별거없어. 지지리 가난하게 사는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키우던 소가 죽는 거야" 감독님이 옆에 계셨다면, 실제 그 노부부가 그리 가난하지도 않다고 첨언해주셨겠지만, 그들의 삶이 '가난'으로 눈에 박히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자식들이 영화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도 그러했겠지만.

 팔려가는 날을 직감하고 눈물까지 보인 소를 어떻게 500만원에 흥정하려 할 수 있냐고. "시골삶에서의 생태적인 순환에 부응하지 않은 인위적인 설정이다"라는 의견에서부터, "할아버지에게 소는 애완용 교감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용 도구였던거 아니냐"라는 문제제기까지. 감독님이 자신의 사비를 들여 포크레인을 불렀다는데, 연출이 빠지면 다큐멘터리가 CCTV와 다른게 무엇이겠소이까. 주제가 '생태적인 순환'이나 '애완용 소와의 우정'이 아닌게죠.

 난 지극히 정적인 화면이 좋았다. 계절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꽃과 벌, 밀과 보리, 이들을 가만히 주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마음에 닿았다.

 소에게 먹일 꼴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서든지, 농약과 사료에 대한 불신 때문이든지,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할아버지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이동수단을 대신한 달구지를 타고 시내병원을 향할때, 수입쇠고기시위대 앞에서 주춤하던 장면도 유쾌했다. 물론, MB와 그 일당은 전혀 웃지 않았다고 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드라마틱한 '절정'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소가 외양간이 아닌 밭에서 일하다 죽었더라면 어땠을까. 내용은 훨씬 더 극적이었지만, 사실성을 결핍한 과도한 설정으로 상황의 설득력은 잃었을 것이다. 3년동안의 수고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소처럼 묵묵히 그의 죽음을 기다린(?) 감독의 성실함에 근거한다. 소소하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 일소에 대한 기억이 전무한 나도 영화를 보다가 눈물 한줄기 쏟아냈으니, 이 영화는 '소통'과 '공감'을 위한 예술적 역할을 충실히 해낸 수작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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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낭소리를 듣는다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을 다해 집중한다는 것. 너무 많은 사람들의 영화가 되었으니까. 1점은 회수해서 9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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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부엉이 - Me and Ow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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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에서 추론하는 사실이 언제나 예측가능한 것은 아니다. '양공주'라는 단어는 금발무리에 드레스를 입은 바비인형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사회적인 선망과 동경의 정반대편에 있었다. 그리고 양공주라는 단어의 모순과 역설은 기지촌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먼저 달러수입의 일꾼으로 격려하는 한편 미군과의 마찰문제는 외면하는 국가의 관리가 그러했으며. 자신들이 마지못해 선택한 길에 들어선 외국인 여성들의 인권을 챙기지 못하는 마마상도 그러했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에서 회원모임으로 마련한 영상은 그 땅의 모순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었다. 인권과 여성, 그 이상을 알지 못했던 내게 한국여성에서 필리핀 여성으로 이어지는, 생계를 위협한다는 이유는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해야 하는 그들의 '가난'이 보였던 것이다.   

 

 술맛을 알아버린 박인순씨가 살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나물을 따거나, 귀뚜라미를 잡기도 했지만, 다리를 벌려야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술을 마셔야 고통스런 기억들이 재생되는 불면의 시간이 멈추고 잠들 수 있었다. 울고 웃으며 토해내는 그녀의 이야기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내면적인 고백이었던 만큼, 과거 그 지역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을 대변했다. 손과 발이 없이 떠다니던 나와 부엉이의 자화상에서 화려한 색상의 옷으로 그려진 친구그림에 이르기까지. 마당전시회의 그치지 않던 그녀의 함박웃음에서 미술치료로 그녀가 얻은 위안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케이블 프로그램의 무례함에 비한다면, 잔잔한 내래이션으로 등장하는 <나와 부엉이>의 박경태 감독은 너무 선한 시선을 가졌다. 노골적으로 카메라를 들어대지 않고서도 선명하게 그녀의 삶을 그려냈고, “더이상 카메라를 들고 쫓아갈 수 없었다”는 고백에서 주인공을 매체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운 마음이 읽혔다. 덕분에 박인순씨의 삶은 가난했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고단했지만 생기 넘쳐보였다.  

 

 박인순씨의 아픔이 치유가 필요한 과거의 상흔이라면 예전 양공주의 자리를 대신하는 이주여성노동자들의 좌절은 현재진행형이다. <길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의 김동령 감독은 증언을 바탕으로 영상을 재구성했고, 말이 통하지 않은 낯선 외국땅에서 그녀들이 직면했을 당혹감과 억울함을 다양한 사진자료로 묘사했다. 그녀들은 촬영중에 강제추방 되거나, 클럽을 탈출해 미군병사와 동거를 하고, 혹은 버림을 받는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한민국 땅에서 성장해도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수도권 인근의 미군부대가 철수하면, 그 곳의 기지촌은 폐허가 되겠지만, 기지촌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평택으로 옮겨갈 뿐이다. 성매매특별법은 현재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까닭에에 박인순씨처럼 과거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들에게는 이주여성노동자들의 관리하는 마마상 역할이 아니고서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 수 있는 재활지원이 미흡한 형편이라고 한다. 실질적인 성매매종사자라 할 수 있는 이주여성노동자들의 경우, 불법체류자라는 불안정한 지위로 강제출국의 위험부담이 상존한다. 그래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법적분쟁으로 끌기 보다는 덮어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국적만 교체되었을뿐, 착취의 악순환을 반복시키는것은 고질적인 '가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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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 Breath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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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나드쇼의 묘비명이라고 하던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감을 잡긴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폭력의 악순환. 우물쭈물하다가 당하겠거니 했다. 한국식 드라마 문법에 익숙해서 상훈이 연희 엄마의 죽음에 관련되었을거라는 상상도 했고, 영재와 연희와 상훈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위기가 등장할 줄 알았다. 보기좋게 예상을 빗나가서 참 다행스럽고 고맙긴 하다만, 우물쭈물하다가 그럴건 예상가능했다. 상훈에게 어울리지 않는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들이 준비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정형화된 영화문법을 충실히 따른듯 하지만, 신인감독으로 실험가능한 패기와 열정이 묻어나는 독립영화다웠다. 하지만 감독 양익준보다 배우 양익준의 발견이 훨씬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사채업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만큼 자연스러운 연기가 배어나왔다. 더해서 각본과 감독이라는 타이틀의 후광이 입었으니 이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어쩔 수 없지 않는가. 그런고로 감칠맛나는 욕과 인정사정볼것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양익준만 보였다.  

 조금 건조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긴급출동 SOS에나 나올법한 캐릭터의 주인공이 솔루션위원회의 도움없이 내상을 치유하게 되는 과정이다.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는 주옥같은 카피마냥 상훈이를 통해 사채시장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대학진학을 종용하는 고등학교 선생님뿐 아니라 등록금 인하 시위, 포장마차 철거에 동원되는 용역이 적나라한 이시대를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엄마가 집을 비운사이 혼자 노는 유치원생과 조폭이 되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오는 고삐리까지 세상살이 곳곳이 상처투성인게다.  

 용산에서 플스를 구입하고 남대문에서 칼국수를 나눠먹는 일상적이고 흔한 풍경이 상훈과 연희에게는 간절했을 것이다. 그들의 소박함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은 결국 가족이란 테두리일지언데, 문제는 폭력인가. 가난인가. 근본적인 '철학의 부재'때문인가. 

 실컷 미워할 수 없는 아픈 상처를 품고 살아야 하는 주인공의 행복과 사랑을 비는 마음 한편으로, 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공주님과 왕자님이 결혼을 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의 결말이 의심스러운만큼 나는 이들의 풋풋한 로맨스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 남자, 진정 그 폭력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련가. 참회와 반성을 시간을 딛고 되풀이되는 사슬을 끊을 수 있으련가. 우생학적인 유전자가 아니라, 30여년 그의 신체에 각인된 폭력의 개선가능성을 신뢰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 그는 조카에게 사과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물쭈물하고 말았다.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이 내게는 해피엔딩이 되었다. 더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되므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차디찬 마음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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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벌하게 연기하던 이 아저씨,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타이거상 들고 웃는 모습은 너무 선한거 아니냐구. 왜 난 속은것 같은 기분이냐구. 자신이 쓰고 출연해서 감독한 영화들고 너무 잘 나가는거 아니냐구. 부러운 마음 별점에 담아 다섯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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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하여 - To Live - Save Our Saemank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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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여나 '새만금 살리기' 캠페인용 필름은 아닐런지 조심스러웠지만, 카메라가 사람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와 함께, '새만금'에서 '청계산' '평택' '용산'까지 어느지역에도 적용가능한 통찰을 담고 있었다. 김종광씨의 말마따나 심지어 20대 삶의 현실도 새만금을 닮지 않았는가. 
 
 이 영화의 미덕은 선정적으로 포장하지 않은 어민들의 넋두리와 그들의 입장을 취한 관점에 있다. 갈등의 현장에서 미묘한 어긋남을 포착해낼만큼 그들과 가까이 있었지만, 동시에 드라마틱하게 연출가능한 류기화님의 죽음에는 거리를 유지했다. 타인의 죽음과 슬픔을 함부로 대상화시키지 않는 머뭇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갖종류의 다큐멘터리 연출기교가 난무하는 텔레비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조심스러움이다.

 충분히 비중있게 다뤄질것이라 기대했던 삼보일배는 불과 3컷가량 다뤄졌고, 도올 김용옥의 인터뷰따위는 없었다. 감독은 철저하게 계화도 이모들을 쫓았다. 그녀들은 타협없이 '해수유통'이란 원칙하에 살아있는 갯벌에서 살고자 했다. 투쟁의 전선에서 누구보다 고군분투했지만 정작 대책위원회는 그녀들에게 귀기울이지 않았다.  

 국가권력은 절대 고분고분하게 살아가는 민중의 편이 아니다. 삶의 터전을 뺏긴 후에야 실감한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은 자꾸만 내치고 버려지고 밀린다. 건설자본과 지역유지를 위한 국가권력의 횡포에 몇백년동안 갯벌과 더불어 살아왔던 그들의 숭고한 밥벌이는 불가피한 희생으로 치부한다. 막아버린 뚝방위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자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지 똑똑히 지켜봐야 한다.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긴 하겠다만.)

 대법원이 새만금 소송을 기각한 후, 홍선장은 딸에게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판사따위는 되지 말라'고 당부한다. '시인'이나 '철학자'가 되어 사회를 비판하라는 그의 뜻을 딸이 충분히 읽어주면 좋으련만. 자본과 권력에 기생해서 자기 앞길 추스리는게 현명하다고 평가받는 2009년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 홍선장과 딸의 대화가 뇌리에 박혀 마음을 데웠다. 

 기도빨이 너무 없는거 아니냐는 이강길 감독의 투정에 문정현신부가 자신은 한번도 이겨본 싸움을 해본적이 없다고 했단다. 이기는쪽에 서서 이긴 결과로 희망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희망이 진짜던가.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서 있어야 할 지점은 분명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좌파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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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간만에 본 다큐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내 열정에 불을 붙였다. 하여서 10점 만점에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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