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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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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성실'에 대한 알량한 사명감이 있다. 과도한 일중독 증세와 더불어, 오락적 유희마저 성실하게 끝장을 봐야 한다는 이상스런  집착이 그것의 방증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열광하면서, 게으름마저 성실하게 게으르고자 하는 건, 좀처럼 미치지 못하는 심심한 삶의 긴장을 조율하는 일종의 원칙같은 거다. 

 어렴풋하게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라던가 아주 오래전 손에 잡혔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제목조차 까마득한)에세이를 기억하고 있다. 일찍이 단거리보다 장거리 달리기에 호기심과 애정을 품었던 나에게 두 책 공히 '완주'의 미덕을 설파했고, 마라톤은 성실함의 끝을 확인하는 징표와도 같았다. 인간의 근성과 끈기의 결정체로서의 '마라톤'이라는 행위에 열광했던 시절을 건너오면서도, 실제 '러너'가 되지 못했던 것은 나의 게으름의 소산이기도 했지만, 보다 합목적인 이유를 필요로 하는 삶의 태도의 변화때문이기도 했다. 달리기가 등산보다, 자전거보다 비용대비 효율성의 측면에서 유리한 기회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여전히 계산은 진행중이지만, 2009년이 '등산'이었다면 2010년은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책 때문이다.  

 내 독서취향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동안 내가 그의 책을 한권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에 적이 놀라곤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던 하루키와의 인연이 1Q84에서 시작되어 이 책에 이르기까지, 나도 슬슬 하(루키)빠가 되어가고 있는 스스로를 확인한다. 

 혹자는 현대도시인의 인간군상, 그 내면의 탁월한 심리묘사가 매력적이라고 했고, 혹자는 사회에 대한 적확한 문제제기에 언제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체념해버리는 패배주의적 냉소가 유감이라고 했다. 이제 꼴랑 두권의 책을 읽는 나는 감히 그에 대한 어떠한 단정도 할 수 없다. 다만, 한편의 소설과, '달리기'를 빌려서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회고록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에 마음을 내준 바,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서 신체 능력을 가다듬어 향상시킨다"는 그의 다짐이 우리를 오랫동안 동시대에 머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물줄기는 강변을 적시고, 푸른 여름 초목을 무성하게 하고, 물새들을 키우며, 오래된 돌다리 밑으로 바져나가, 여름 하늘의 구름 모습을 물 위에 띄우고(겨울에는 얼음을 띄우고), 딱히 서둘러 급한 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쉬어가는 여유도 보이지 않고, 여러 검증 과정을 거쳐오며 굳어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관념이라도 지닌 듯 그저 묵묵히 바다로 향해 간다. - p.30  
   

 물처럼 살겠다고 공공연하게 되뇌이기 시작한지 어언 10년. 그 가치를 충분히 멋드러지게 그려지도, 그 뜻에 충분히 부응하지도 못한채로 흘러오기만 했다. 내가 흘러온 어느 한곳 초록색 생명이 자라나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면서 다시 또 묵묵히 흘러간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직업적인 영역에 있어서나 타인과 우열을 겨루고, 승패를 다투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그것으로 세계는 성립되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가치관이 있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있다. 그와 같은 차이는 일상적으로 조그마한 엇갈림을 낳고, 몇 가지인가의 엇갈림이 모이고 쌓여 커다란 오해로 발전해갈 수도 있다. 그 결과 까닭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해를 받거나 비난을 받거나 하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건 괴로운 체험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p.39-40
 
   

 만난지 4개월 된 혹자가 '너는 색깔이 너무 뚜렷하다'며, 의연하고 강단있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염두해서 노력한 결과이지만, 실상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색깔이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부침에 언제나 늘 한결같이 위해서 내면을 부지런히 단련할 뿐, 한가지 생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말랑말랑한 두뇌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삶의 방식을 정립하는데 게으르지 않았을 뿐.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p.115-116)

 
   

 직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조언이 '일에 끌려가지 말고, 일을 끌고 가라'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고 전전긍긍하면서 일에 휘둘리지 말고, 주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일을 처리하라는 뜻.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서 충분히 귀감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여기저기서 계속되고 있다. 얄팍한 꼼수로 편해지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날 즈음,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를 계속 달리게 한다. 

   
 

 무라카미씨처럼 매일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러다가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건전한 행위이고, 작가라는 사람은 공서양속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되도록 건전하지 않은 생활을 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속세와 결별하고 예술적 가치를 지닌 순수한 뭔가에 더욱 근접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통념 같은 것이 세간에 뿌리 깊게 존재한다. 긴 세월에 걸쳐 그와 같은 예술가=불건적(퇴폐적)이라는 도식이 형성되어 온 것 같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자주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의-좋게 말하면 신화적인-작가가 등장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가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묘한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복어는 독이 있는 부위가 가장 맛있다고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전한' 작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니만큼 작가(예술가) 중에는 실생활 그 자체의 레벨부터 퇴폐적으로 전락하고, 또는 반사회적인 의상을 걸치는 사람들지 적지 않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그와 같은 자세를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시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어딘가에서 그 에너지를 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기초 체력 위에 그 에너지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할까?  

-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p.149-150) 

 
   

  농담처럼 말한다. 담배도 술도 없는 반듯한 삶은 뭔가 진보적이지 않아. 그래서 서두의 돌발질문에 대한 하루키의 대답이 퍽 인상적이었다. 과시적으로 담배를 피우고, 전투적으로 술을 마시는 상처덩어리를 한사람이 떠올랐다. '불건전함'에 대한 애찬이 넘치는 와중에, '건전함'에 대한 적극적 옹호가 신선했다고나 할까 

   
   우리는 초가을 일요일의 소박한 레이스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다음 레이스에 대비해 각자의 장소에서 (아마) 이제까지와 같이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혹은 훨씬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도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p.256-257)  
   

 그런 전차로 2010년은 부지런히 달리기로 했다. 42.195는 힘들겠지? 하프라도,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무시무시한 다짐 하나 덩달아 마음에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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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여자 - 떠남과 돌아옴, 출장길에서 마주친 책이야기
성수선 지음 / 엘도라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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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무의욕을 고취시키기위한 '업무능력향상교육'의 구석진 자리에서 '밑줄 긋는 여자'를 봤다. 인생선배라 할법한 성수선 작가의 시시콜콜한 수다가 뻔한 내용의 교육보다 흥미롭긴 하였으나, 귀한 나무를 베어내서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올시다' 

 자격지심탓이라고 해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주류사회에서 나름의 입지를 세우고, 다방면에 걸친 독서력을 맘껏 발휘해서, 적당히 생활 철학을 버무려낼 줄 아는 글쟁이. 감각있는 문체는 아닐지언정 진정성이 담겼고, 진부한 결론으로 끝나더라도 글쓰기 작업에 성실하게 노력하는 작가인건 분명하다. 꽤 오랫동안 백수였고, 남아도는 시간 꽤 많은 책을 읽었던 나는, '글쟁이'에 대해서 나름의 엄격한 기준이 생겨버린 탓에, 그녀가 오랜시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글에 대한 열정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만 깊은 존경을 표할 따름이다.

 막상 빈정이 크게 상한 이유는, 이 책이 '김현진'의 책보다 더 많이 팔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책을 빙자해 시시콜콜한 자신의 연애담, 세계각지의 친구 자랑, 개그콘서트가 선사하는 즐거움과  월요일 아침 강박의 이중성 따위를 논하는데 책은 참 많이도 팔렸다. (알라딘 판매량만 확인했음이다) 똑같이 '연애'를 말하더라도 다양하고 개별적인 사례를 바탕삼아, 보다 재치있는 글솜씨로, 궁극적이고 사회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김현진의 책보다 더 많이 팔렸다. 후자는 글쓰기를 업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더 절실하게 팔려야 할 이유가 있지만, 아마도 이것이 '마케팅'이려니.  

 가볍지만 유치하지 않고, 지적이되 어렵지 않은 생활인의 독서. 책 자체에 대한 심도있는 고민이 없는 독서에세이에 '생활밀착형'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화려한 작가의 이력과 스타일리쉬한 표지디자인으로 승부수를 띄운다. 그런게 먹히고, 살다 보면, 일하다 보면, 그 수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지는 법이라고 설득하지만, 난 아직 이 정도에 감동받을 만큼, 충분히 늙지 못한 탓이리라. 

 직장생활 3개월차, 이 책을 선물해주신 님은 아마도 그녀의 '꾸준함'에 공명하길 기대했으리라, 

   
   달인이 되는 길은 길 위에 머무르는 거다. 하고 하고 또 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는 거다. 개그의 달인 김병만처럼, 생활의 달인 봉투아줌마처럼,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처럼 포기하지 않고 길 위에 머무르는 거다. '10년이면 일가를 이룬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일단은 계속 하자, 포기하고 싶을 때 한 걸음만 더 (p.97(  
   

 그리고, 한창 자본주의틱한 마인드 함양중인 중인 내게 귀감이 되었던 경영 철학자들의 일화.

   
 

 피터 드러커는 평생에 걸쳐 읽고, 쓰고, 공부했다. 특정 분야에 치우침 없이 그는 매년 새로운 주제를 정해 석 달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p.71) 

 삶은 공중에 다섯 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게임과 같습니다. 다섯 개의 공에 일, 가족, 건강, 친구, 영혼(자기 자신)이라고 이름 붙이고 공중에 돌려보십시오. 당신은 곧 '일'이라는 공은 고무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떨어뜨려도 바로 튀어올라옵니다. 그러나 다른 네 개의 공은 모두 유리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라도 떨어뜨리면 손상되고, 흠집이 나고, 산산이 부서져 다시는 예전처럼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 다섯 개 공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p.75)- 코카콜라 회장 더글러스 태프트의 2000년 신년사 中

 
   

  "진정 무서운 건, MB가 아니라 책 읽는 우파"라고 했던 말을 실감하게 만들만큼 성찰과 매력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그나저나 야근과 철야가 만연한 대한민국에서 '가족'과 '친구', '영혼'의 유리공이 고무공 '일'보다 소중하게 취급되는 날이 오기는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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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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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그녀가 특별히 80년대 대학이야기에 감응하는 이유를 모를리없다. 심지어 21세기에 대학을 다녔던 나조차 학생운동의 끝을 잡고 바둥거리지 않았던가. 

 과거의 향수를 안주삼아 추억할 뿐, 사교육과 주식에 몰두하는 꼬라지가 시대의 절망만을 보여주고 있을 때, 노골적으로 그 시대의 찬란한 무용담이 짜증스러워지는 찰나, 무리들의 한켠에서 조용히 사색하던 작가가 묘사하는 1980년대를 만났다. 정여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문장 속에서는 예리한 지성과 따스한 멜랑꼴리가 불안하게 공존한다'

 어쩌면 20대가 그러려니. 의기탱천한 혈기로 팔뚝질을 하거나. 적당한 포지션를 찾지못하고 우왕좌왕 우물쭈물 엉거주춤 그렇게 흘러가거나. 그 많은 일들이 한가지 통로로 수렴했을 때조차 의연한 어른인척 흉내내는.  

 늘상 대오 중간에서, 혹은 행렬을 이탈에서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두어왔던 까닭에, 그녀의 주춤거림이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특별히 아버지와의 낮술과 연애의 기승전결이 마음에 감응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지난 주말은 특별히 애틋했고, 또 덕분에 진보신당 헌책방에 기증된 5권짜리 아라비안나이트를 덜컥 구입해버렸으니, 20대가 가기전에 꼭 읽어보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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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타인의 발음을 통해서만 귀에 익은 내 이름을 직접 내 이름으로 말하고 소개하는 것은 낯설고계면쩍은 경험이었다.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자기소개라는 절차는 일종의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개자는 자기 이름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히 발음해야 했고, 듣는 청중은 소개자가 임의로 요약한 그 혹은 그녀의 존재성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기소개는 소극적인 자들이 도태되고 적극적이고 용감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로의 입사식이었다. 불리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부르심을 유도하는 방식,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한시바삐 소비하도록 이름을 세일하는 방식이었다(p.23) 

 여전히 기만에 찬 감상을 못 버린 나는 내 눈물이 장갑으로 따귀를 맞은 모욕감에서 솟구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진정 내 눈물의 의미는 그런 고상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눈빛에 어떤 감정을 담을 수 있고 상대방이 눈빛을 통해 그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면 전경과 나는 그 순간 진정 눈빛으로 교감했던 것이다. 전경을 바라볼 때의 내 눈빛에는, 비록 불타는 적의를 담으려고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실제의 내 눈빛에는 애원과 공포가 담겨 있었을 것이고, 전경은 그것을 제대로 읽었던 것이다. 내 속에 있던 약아빠진 계집애가 내 눈초리에 그런 얄궂은 색칠을 했고, 꼬리를 내린 강아지같이 샐쭉 내려앉은 내 눈을 본 전경은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냐는 심정으로 곤봉이 아닌 가벼운 가죽장갑으로 나를 따끔하게 혼내주었던 것이다. 종태가 아픔을 못 이겨 울었다면 나는 모욕도 울분도 아닌, 분노도 치욕도 아닌, 단지 비굴한 감사를 못 이겨 울었을 뿐이다. 내가 이런 연유로 운다는 걸 종태나 해수가 알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예전에 해수의 차돌멩이 같은 몸 뒤로 내 길쭉한 몸을 숨겼듯이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122 

 

 이야기는 진정으로 샤푸리야르 왕을 치유했는가? 나를 치유했는가? 지금에야 비로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야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의 모든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로터스 꽃이다. 셰에라자드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이것 좀 들어보세요' '저것 좀 들어보세요' 맛깔스럽게 권하면서 무한한 괄호의 연쇄 속으로 샤푸리야르 왕을 빨아들인다. 이야기는 자신의 상처만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임시로 치유하는 장치이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내 과거의 불행도 그다지 엄청난 것은 아니로군, 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끄덕이는 순간에 불행했던 왕은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 속의 한 불행으로 환치하고는 거리를 두고 그 불행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신의 불행이 그의 불행의 최대치이자 요약이었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을 딛고 일어설 기운을 주는 동시에 그 해결방식의 극단성을 초래했다면,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속의 진기담과 불행담과 모험담은 그의 불행을 다양한 제반 인간사의 지평에 올려놓고 이러저리 재고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었고 따라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불행을 인간적으로, 즉 문명적으로 해결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강렬한 이미지, '오, 나의 사우드 님' '나를 후련하게 해줘요'라고 외치는 여자들의 쟁쟁한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아라비안 나이트』의 최대 매력은 여기에 있다. 마신의 불행이 샤푸리야르 왕의 불행을 위로하면서도 가슴 저미게 상기시키는 불행의 심연이었던 반면에, 셰에라자드가 해주는 이야기 속의 불행들은 인생이라는 양탄자가 휘감을 수 있는 무한한 불행들의 너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깊이를 길이로 바꾸는 날렵하고 미적인 범주 넘나들기, 이미지의 깊이로 시작하여 서사의 길이로 끝나는 것, 심도에 대해서 연장으로 대답하는 것, 불행한 의식의 심연을 무한하고 다양한 서사의 미로로 봉쇄하는 것, 길을 잃게 만드는 것 칼을 묻었던 곳을 잊게 만드는 것. 

 『아라비안나이트』의 표면적인 질문과 대답은 방종에 대한 정숙으로의 보상이다. 그러나 이 가짜 문답 뒤에 숨은 것은, 시와 소설, 이미지와 서사, 일탈과 치유, 광기와 문명의 문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스물한 살의 나는, 이 심오한 문담 속에서 진정한 해답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낮술처럼 값싼 망각 속으로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173-174 

  

 사변적인 자들은 말한다. 의심하는 순간 사랑은 완성된다고. 회의에 빠졌을 때 비로소 사랑의 정수를 맛보게 된다고. 사랑에 대한 믿음은 한갓 베일 뒤를 보지 못하고 베일 위의 그림만을 보는 허약한 환상일 뿐이라고. 그러나 철학적인 논객들의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사랑의 정수나 실체에 관련된 진리일지는 몰라도 행복한 사랑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사랑은 확실성을 동반하는 한에서만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런 연애의 행복감도 사랑의 확실성이 일상 속에 용해되어 더이상 아무 새로움도 환기하지 않는 불행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다가 자세를 조금 바꾸었을때 갑자기 몸이 편안해지고 짧은 행복감이 찾아들듯, 우리는 연애의 작은 고비고비마다 서로에게 다정한 마음이 되어주었고, 그 다정함이 사랑의 이마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걸 확ㅇ니하면서 잠시 달콤한 행복을 맛보았다.   216

 

 한영과 헤어진 이후에야 나는 오히려 그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죽을병은 아니지만 가볍게 취급하기는 곤란한 어떤 병에 걸려 당분간의 요양이 필요한 환자처럼 나는 아주 허약하고 고즈넉한 상태였다. 한동안 너를 생각할 것이다. 한동안 너를 잊어갈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한동안, 세월이 흘러 마침내 정말 너와 헤어졌구나 하는 실감이 드는 날이 오면그제야 매우 서러울 것이다...... 잔뜩 감상적이 된 나는 이미 남남이 된 한영에게 속류 김소월식 버전의 감미로운 이별사를 속삭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따위를 완전히 버리고 있는 나 자신을 제법 신통하게 여겼다. 217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치킨수프를 한술 뜨면서 나는 가난한 부부처럼 냄비를 빋기로 한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믿을 것이다. 닫히지 않은 이야기, 닫히지 않은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완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북극을 넘어 경계를 넘어 스스로 공간을 열며 뛰어가는 냄비처럼, 상처를 열린 우리의 몸처럼, 기억의 빛살이 그 틈새, 그 푸르른 틈새를 비출 때 비로소 의미의 날개를 달고 찬란히 비상하는 우리의 현재처럼.....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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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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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추된 가치와,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다같이 초라한 외모를 하고 있습니다. 둘은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양자를 혼돈하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20쪽

낙천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에는 우둔의 악취가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빅.-40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개의 거짓 믿음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 하나는 <영원한 기억>(사람들, 사물들, 행위들, 민족들의)에 대한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교정>(행위들, 실수들, 죄들, 부당행위들의)에 대한 믿음이다. 이들은 둘 다 모두 거짓 믿음들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이와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망각될 것이고, 교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교정의 과업은(복수도 용서도)망각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이미 있었던 부당행위를 교정하지 못할 것이고, 모든 부당행위는 망각될 뿐이다-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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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란 무엇인가 태학산문선 102
심노숭 지음, 김영진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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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읽었던 동화의 주제는 한결같이 고진감래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세상의 이치인양 선을 독려했다. 하지만 한해 두해 세상살이의 결이 두터워질수록 착한사람이 복을 받는 다는 진리는 다만 동화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회의만 짙어지기 마련이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한다는 여자의 사명감, 가부장적 질서하에서의 폭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노파에서 아내로 이어지는 순정한 염원을 몰라주는 하늘은 어찌 그리도 무심한가. 

 내세, 혹은 사후세계는 다만 좌절을 위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서점가를 휩쓰는 처세술은 약삭빠르게 이익을 챙기는 나쁜 사람이 되라고 공공연하게 충고한다. 돈을 사회적 미덕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양심에 근거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흥부보다 당장의 실리와 이해관계를 우선으로 삼는 놀부가 긍정적인 인간상으로 재평가 받기도 하지 않는가. 종교에서 벗어난 근대적 인간이 일면 명확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불필요한 패배감을 피하기 유리할 지도 모른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내 친구 김군은 1000원으로 구할 수 있는 여섯 개 숫자에 즐거운 희망을 품고 일주일을 성실하게 살아낸다. 대물림하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가 흥부에 날아든 제비와 끊임없이 재화가 쏟아지는 박처럼 일확천금의 꿈을 기대한다고 모질게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의 성정과 행실은 하늘의 복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서울이란 공간은 그에게 창문 없는 고시원의 방 한 칸만을 허락했을 뿐이다. 그가 기억할 수 없는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든지, 그가 상상할 수 없는 내생에 얼마나 큰 부를 누릴지 현실의 처지를 그저 수긍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늘 생기와 활력이 넘치고 나눌 수 있는 작은 것들에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는 긍정적인 기운을 가지고 있다. 

 보살할멈 박씨와 심노숭의 아내가 득남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생이 불운했던 것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당대의 사회적 요구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난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 시대 숙명처럼 그 짐을 짊어진 사람들은 내내 불운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적 질서를 타파한 세상에서 출산만으로 축복받을 수 있는 것처럼 가난을 자처하는 생태적인 삶의 미덕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게 된다면 로또 없이도 희망이 샘솟게 될 것이다.  

 이상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선을 지향한다. 경쟁과 욕망으로 피폐해진 마음을 다독이며 그래도 지켜야할 정의와 진리를 쫓아 철학과를 선택했고, 진보의 신념을 부지런히 행동으로 옮겼다. 스펙으로 명명되는 조건들로 치장하기보다 내면의 덕을 쌓을 수 있는 고전을 탐독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마음이 풍요로워서 “배우고 또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을 체득할 수 있었다. 

 선의 이유가 복의 추구에 있지 아니하므로 “선행 그것이 바로 선보요, 악행 그것이 바로 악보”라는 작가의 견해는 전적으로 옳다. 악인에 대한 하늘의 벌을 구하느니 차라리 타인에게 해를 가한 ‘양심적 죄책감’을 신뢰할 일이다. 설령 우리 사는 세상이 선함을 조롱하며 악함을 권하더라도 나누고 베풀면서 커지는 즐거움은 퇴색될리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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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제였다. 더 말해서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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