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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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누구나 유년시절, 모종의 철조망에 저항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아이들의 일상은 실제로 온통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탐험 그 자체이다. 전자오락가 TV가 단단히 그들을 포섭하면서 아이들의 탐험 또한 비상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타고난 야성을 길들이려는 부모와 이웃, 그리고 학교의 거대한 훈육 밑에서 조금씩 힘을 잃고, "부노미과 선생님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고, 그 후엔 거리의 무수한 광고메시지가 주입하는 대로 "부자"가 되어 더 많이 "소비"하는 착한 자본주의자가 되는 일에 긴 줄을 설 때, 우린 비로소 "이제 철이 들었다."는 덕담을 듣는다. (p.5)  
   

 경계를 넘는 다는 것, 궤도를 따라 도는 것, 어느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유로운척 했지만, 마음 속 불안을 감당하기 버거웠고, 태연한척 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들에 안달냈다. 욕심이 없는 척, 조건에 연연해했고, 이미 이탈한 궤도를 찾아가겠다고 꾸역꾸역 시들어갔다. 나 말이다.

 목수정처럼 맘껏 자유로운 영혼. 거침없이 당당한 여인들을 사랑한다. 그러면서 넌 왜 그렇게 찌질하냐고 물으시면, 아직 마음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한다. 진심이다. 그리고 난 계속 이렇게 이상과 현실 어딘가에서 부유하게 될거라는걸 안다. 팔자다.

   
  우주 전체와 왕성하게 친구하며 지내는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릴 일이 없고, 천재적인 창조력을 무궁무진하게 발휘하면서 사는 것은 당연하다. 아침에 칼리가 눈을 뜨고 서서히 세상과 다시 접촉을 시작하는 과정을 보면, 그 동작 하나하나에서 무수히 금빛 조각들이 반사되면서 떨어진다. 그 광경은 언제나 생명의 눈부심을 일깨우고 이난의 신성을 투명하게 표출한다. 화분에 스프레이를 뿌릴 때는 "엄마, 꽃이 정말 맛있다고 했어."라고 말하고, 아가 변기에 떨어진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보고는 "엄마, 내 뱃속에 있는 하트가 똥으로 나왔나 봐."한다 (p.108-109)  
   

 인체의 신비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우주의 신비, 생명의 경이. 여성의 날을 선택해서 태어난 칼리를 주저없이 낳아 기르는 용기. 세상의 모든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창피해'란 단어를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철학. 그녀처럼 거꾸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뚝심이 필요하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정신적으로 풍성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나조차도 자녀양육의 부담은 만만치 않아서, 칼리는 '프랑스 시민'이잖아. 라면서 스스로의 결정을 위로할 따름이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은 출산파업이기에.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한 우물' 이데올로기의 강박으로부터 탈출이다.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금과옥조이다. 살면서 이 주장에 대해 감히 시비거는 사람 몇 못봤다. 그러나 한우물 파기 싫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그 우물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할 건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는다. 다행이도 자기가 처음 파기 시작한 우물에서 계속 재미있는 게 나오면 좋겠지만,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지조없이 연애도 많이 했고, 또 지조없이 여러 우물을 파면서 살아온 나한테는 언제나 이 경구가 마음의 짐이었다. 그걸 어느날 희완이 훌훌 떨치게 해주었다. 문학, 연극, 사진, 문화정책, 흙건축 참 난 너무 여러 우물을 파는 것 같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렇게 잠시 회의하고 있는 나에게 희완은 말했다. "얼마나 좋아.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거. 그리고 그걸 다 해볼 용기가 있다는 거. 그럼 너의 인생이 얼마나 풍요롭겠니." 오호, 그렇다. 관점을 전환하면 그렇게 된다. 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한 영역씩 맡아서 한우물을 죽어라 파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수도 있다. 난 이 거대한 사회의 나사가 아니다. 나 혼자서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구성할 수 있다. 여러 우물을 파면서, 세상의 모든 재미를 두루 즐기면서. ( p.163 )  
   

 눈물나게 감사한 일이다. '선택'과 '집중'이라고 말하며 금융권 입사에 성공한 친구는 1년 한번 휴가를 기다리며 한해를 버틴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옹색한 꼬라지의 나는 아직 못이룬 꿈이 있다며 1년의 반을 딩가딩가거리고 있다. 이솝우화에서는 베짱이를 기다리게 추운겨울이라고 했지만, 개미는 과연 겨울에 쉴 수 있는걸까? 풍요로운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내게 주어진 삶을 악착같이 챙기는 거다.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고, 그리고 스스로의 길을 긍정하면서.

   
  "넥타이 속의 남자는 절대 사귈 수 없어!"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연애 불가 상대의 기준이었다. 그 필터에 많은 남자들이 무더기로 걸러졌다. 내가 보기에 이 사회가 남성에게 허락하는 모든 악행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사람들, 단지 대세라는 이유만으로 우파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넥타이를 죽어라 매고 다녔다. 자신의 자아가 찌그러진 것도 모자라 가부장적인 위세로 세상까지 찌그러지게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도 넥타이를 소중하게 목에 걸어 매고 다녔다. 넥타이를 맨 대신 자유를 풀어버린 사람들이었다. ...... 예술적인 감수성은 있는 사람인가? 삶에 대한 열정은 충만한가? 지적인 욕망과 그가 쌓아온 지식의 창고는 어느 정도인가? 어린시절 부모와 충분히 애정을 교감했는가? 정치적 지향은 어떤가? 사고와 행동은 얼마나 일치하는가? 머릿속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미적 감각이나 옷 입는 취향은 만족스러운가?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외모인가? '멋있다'는 형용사에 가까운 사람인가? ( p.253-254 )  
   

 나의 이상형은 줄곧 바뀌었다. 어린시절 언변이 화려하고 몸가짐이 거침없이 기세등등한 날렵한 외모의 사람을 연모했다면, 또 한때는 단순하고 소박하면서 수더분한 사람이 좋았던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 서로의 삶을 긍정하며 조심스럽게 미래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마초의 경계를 살짝 넘어왔지만 차마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한, 깊게 사유하고, 따뜻하게 마음 쓰는 고운 사람이다.

 가부장제의 저격수를 자처하는 작가답게 결혼과 가정에 대한 비판은 통쾌, 상쾌, 유쾌하다. 우리의 취향이 구조조정 당하기도 했겠지만, 세상에서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배우자의 조건 또한 무시해버릴 수 없기에 머뭇거리는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이중성을 확인할 밖에.

   
  최근 들어 깨달은 좌와 우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는 전자는 생명을 지향하고 후자는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조화로운 상생을 꿈꾸며 깨어있는 존재가 좌파라면, 텔레비젼 앞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일찌감치 자신의 영혼을 무덤 속에 파묻고 보수언론의 선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믿는 쪽이 우파다. 우파가 가장 싫어하는 좌파의 부류가 생태주의자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연일까.( p.290 )  
   

그런 전차로 나도 좌파였다.

   
  삶을 즐길 줄 모르면 좌파가 아니고, 하면서 신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다. 모든 엄숙주의와 모든 '묻지마 일벌레'들은 결국 위선으로 그 세월을 보답한다. 휴일도 반납하고, 밤잠도 안 자는 파란지붕집의 사람들이 엄청 사고를 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하다. 사람은 일하는 기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될 수 없듯이.( p. 309 )  
   

현재를 즐기자는 명제는 관념상에만 존재할 뿐, 대개 미래에 저당잡힌채 그냥저냥 살아가는 삶들이 태반이다. 그런 삶을 가엾다고 여기지도 못하고 오늘날의 밥그릇을 위협받는 것이 또 현실이다. 목수정은 옳았다. 우리가 거추장스러운 속박을 하나하나 벗어버릴수록 인생은 또 세상은 찬란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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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8-11-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읽지를 못했어요.
너무 잘난 사람 이야기일까봐 아직 선듯 손이 가지 않았는데 후기를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저도 요즘 간단하고 소박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