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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의 슬픔
테즈카 오사무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하필이면 '플루토' 8권을 찾아헤매는 중이었고.
때마침, 도서관 책장에서 발견했을 따름이다.(검색이 아닌 방식으로 책을 골라 대출하는것은 얼마만이었던가.)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라는 의미심장한 책을 사랑했던지라, 막연하게 아톰은 원자력을 동력삼는 주제에 착한척 하는 로보트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다. 그 작가가 얼마나 생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미래사회의 발전을 경계했는지는 가늠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우라사와나오키'를 좋아했을 뿐이고, 그가 데즈카 오사무를 존경했을 뿐이다.
오며가며 지하철에서 펼칠만한 가볍고 작은 책이었는지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노년의 지혜'라고 생각하며 술술 읽었다. 그동안 재미없고 난해한 책들로 잔뜩 팍팍해진 머리에게도 한줌 휴식이 필요할 법 했으므로, 나쁘지 않다. 만, 너무 착한 이야기는 내 취향이 아닌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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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꽤나 콤플렉스가 많은 인간입니다. 어쩌면 그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투쟁이 내 만화의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한심한 아이'나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딱지가 붙은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정신이 궁핍한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이일지라도, 그 내면엔 어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저마다의 아이들 속에 숨어 있는 그 보물과도 같은 재능을 발굴해낼 수 있도록, 어른들은 보다 깊고 따스한시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p.58-59)
인간은 그저 목숨을 연명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도 '삶의 보람'이 없으면 의욕적으로 살지 못합니다. 발달한 의료기술에 의해 생명을 유지한다 해도 오히려 괴로움과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비단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는 꽤나 냉정한 데가 있는 듯합니다. 노인을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바라보는 청장년층의 시선은 말도 안되는 착각이며 오만입니다.젊은이들도, 지금 사회 일선에서 한창 일하는 사람들도, 젊음을 만끽하며 세상을 즐기고 일에 몰두하는 동안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자신도 노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라고 대꾸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일생을 성찰하는 의미에서라도 몇십 년 동안 계속 일을 해오다 늙어버린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지 한 번쯤 차분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툭하면 병에 걸리고 신체적인 장애까지 동반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젊었을 때는 마음대로 움직이던 손과 발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의 자괴감과 비참함, 자동판매기 앞에서 어설픈 동작으로 우물쭈물하는 자신의 모습에 노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인들에 대한 주위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더라도 일본의 역이나 빌딩 등 도시의 구조는 도저히 노인이나 장애인을 배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신체가 부자유스러워지고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다름아닌 곧 마주하게 될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지요.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인이나 몸이 불편한 이들이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고민해야 합니다.(p.80-81)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최고예요! 아톰에게 '애스트로 보이'라는 별명을 붙인 건 실은 우리 집 아이랍니다. 듣자마자 곧장 이름을 바꿔줬죠. 애스트로 보이는 정말 좋은 이름이에요."
이 자화자찬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가 되물었습니다.
"아톰이란 이름이 뭐가 어때서요"
그러자 미국에서 아톰은 방귀를 뜻하는 속어라고 일러주는게 아닙니까.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기에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흐뭇한 기분도 잠시, 문화의 차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시청률도 상당히 높고, 반응도 좋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꽤 많이 뜯어고쳐야 할 것 같아요."
만화에서 덴마박사는 자신의 죽은 자식을 본떠 아톰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아톰이 자라지도 않고 계속 아이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자 '이런 건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로봇을 서커스단에 팔아버립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인신매매'에 해당하니 수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이야기에 손을 댈 수는 없어서 이 에피소드는 삭제한 후 반영하였습니다.
또 아톰이 못된 로봇을 무찌르면 대개 그 로봇이 산산조각나거나 손발이 망가지는데, 이것은 살인에 해당하므로 고쳐야겠다고 했습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라면 상관없지만 여기 등장하는 로봇은 걷고 말하고 생명까지 지닌 존재인데, 아무리 악당이라 해도 아톰이 때려부수는 것은 교육상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톰은 어린이 프로그램 프라임 시간대라 할 수 있는 토요일 아침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다음날인 일요일이면 어린이들이 교회에 가게 됩니다. 자신이 본 것을 목사에게 열심히 이야기해주면, 목사는 그건 사악한 만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NBC측은 이런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아톰이 못된 로봇을 무수고 난 후에, 나중에 다시 조립해서 '내가 나빳어,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는 고칠 수 없어요!"
나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또, 아톰이 악당을 감옥에 가두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악당들이 철창에 매달려 제발 용서해달라고 울며 애원하지요.
"철창이나 감옥은 어린이를 폐쇄적인 성격으로 만드니까 수정했으면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쇠사슬에 쇠공을 매달아서 다리에 묶으면 되지요,"
나로서는 감옥이나 쇠사슬이나 그게 그거 같은데, 어쨌든 미국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덤을 그릴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나오면 일단 가톨릭으로 받아들입니다. 미국에는 개신교, 이슬람교, 불교신자가 모두 있지요. 십자가가 등장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채널을 돌려버려서 시청률이 떨어지니 어떻게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무덤만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우주소년 아톰>은 뜨거운 호응을 받긴 했지만, 미국으로 보낸 200편 가운데 40편 정도가 되돌아왔습니다.
더욱 난감했던 것은 <밀림의 왕자 레오>였습니다. 이 작품의 무대는 아프리카로 당연히 흑인이 등장합니다. 콩 족이라는 흑인들의 마을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흑인을 모두 백인으로 바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니 그럼 흑인들을 모두 할리우드 스타처럼 팔등신으로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백인은 아무리 추하게 그려도 상관없다나요.
게다가 아프리카 각국의 사람들을 한데 묶어서 '흑인'으로 지정해도 안 된다. 각 나라의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한다. 전통의상 같은 것을 입는 것도 금물이며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그려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더이상 <밀림의 왕자 레오>가 아닌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 p.102~105 )
물론 지금 당장 '만약~라면' 하고 상상해보면 일단 암담한 상황부터 떠오릅니다. 하지만 미리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힘을 내 버티면서, 차라리 이런저런 어두운 상상을 전부 다 해버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거꾸로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하며 그 속에서 밝은 미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바쁜 나머지 그런 상상조차 쓸데없는 바보짓이라 여기는 어른들을 어쩌면 좋을까요? 언뜻 보기에 하찮은 일, 쓸모없는 일, 궤도를 벗어난 일도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쓸모없는 것, 멀리 돌아가는 것,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잠심 딴짓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풍요로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합리주의나 생산지상주의는 결국 그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때 묻지 않은 감성과 독창성을 지닌 어린이들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의 삶이 앞으로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과연 당신은 무엇을 할까요?
'만약 자녀의 목숨이 앞으로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요?
이는 언뜻 보기에는 너무도 어두운 'If'이지만, 그 결과 떠오른 생각을 몇십년 동안의 인생에서 조금씩 실현해나간다면 그 양상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조금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의 현실에서부터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서는 현실만 직시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본질을 발견해야 합니다. 개개의 사건과 상황에 상상력을 발휘해 깊숙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 상상력은 원대한꿈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 우리 이웃의 고민에 다다르게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민에 끼어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기 위해서는 따뜻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입니다.(P.168-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