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톰의 슬픔
테즈카 오사무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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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필이면 '플루토' 8권을 찾아헤매는 중이었고.  

 때마침, 도서관 책장에서 발견했을 따름이다.(검색이 아닌 방식으로 책을 골라 대출하는것은 얼마만이었던가.)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라는 의미심장한 책을 사랑했던지라, 막연하게 아톰은 원자력을 동력삼는 주제에 착한척 하는 로보트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다. 그 작가가 얼마나 생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미래사회의 발전을 경계했는지는 가늠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우라사와나오키'를 좋아했을 뿐이고, 그가 데즈카 오사무를 존경했을 뿐이다. 

 오며가며 지하철에서 펼칠만한 가볍고 작은 책이었는지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노년의 지혜'라고 생각하며 술술 읽었다. 그동안 재미없고 난해한 책들로 잔뜩 팍팍해진 머리에게도 한줌 휴식이 필요할 법 했으므로, 나쁘지 않다. 만, 너무 착한 이야기는 내 취향이 아닌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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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꽤나 콤플렉스가 많은 인간입니다. 어쩌면 그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투쟁이 내 만화의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한심한 아이'나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딱지가 붙은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어른들의 정신이 궁핍한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아이일지라도, 그 내면엔 어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저마다의 아이들 속에 숨어 있는 그 보물과도 같은 재능을 발굴해낼 수 있도록, 어른들은 보다 깊고 따스한시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p.58-59)  

 

 인간은 그저 목숨을 연명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젊은이는 물론 노인들도 '삶의 보람'이 없으면 의욕적으로 살지 못합니다. 발달한 의료기술에 의해 생명을 유지한다 해도 오히려 괴로움과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비단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는 꽤나 냉정한 데가 있는 듯합니다. 노인을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바라보는 청장년층의 시선은 말도 안되는 착각이며 오만입니다.젊은이들도, 지금 사회 일선에서 한창 일하는 사람들도, 젊음을 만끽하며 세상을 즐기고 일에 몰두하는 동안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자신도 노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라고 대꾸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일생을 성찰하는 의미에서라도 몇십 년 동안 계속 일을 해오다 늙어버린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지 한 번쯤 차분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툭하면 병에 걸리고 신체적인 장애까지 동반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젊었을 때는 마음대로 움직이던 손과 발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의 자괴감과 비참함, 자동판매기 앞에서 어설픈 동작으로 우물쭈물하는 자신의 모습에 노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인들에 대한 주위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더라도 일본의 역이나 빌딩 등 도시의 구조는 도저히 노인이나 장애인을 배려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신체가 부자유스러워지고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다름아닌 곧 마주하게 될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지요.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인이나 몸이 불편한 이들이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고민해야 합니다.(p.80-81)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최고예요! 아톰에게 '애스트로 보이'라는 별명을 붙인 건 실은 우리 집 아이랍니다. 듣자마자 곧장 이름을 바꿔줬죠. 애스트로 보이는 정말 좋은 이름이에요." 

 이 자화자찬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가 되물었습니다. 

 "아톰이란 이름이 뭐가 어때서요" 

 그러자 미국에서 아톰은 방귀를 뜻하는 속어라고 일러주는게 아닙니까.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기에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흐뭇한 기분도 잠시, 문화의 차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시청률도 상당히 높고, 반응도 좋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꽤 많이 뜯어고쳐야 할 것 같아요." 

 만화에서 덴마박사는 자신의 죽은 자식을 본떠 아톰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아톰이 자라지도 않고 계속 아이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자 '이런 건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로봇을 서커스단에 팔아버립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인신매매'에 해당하니 수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이야기에 손을 댈 수는 없어서 이 에피소드는 삭제한 후 반영하였습니다. 

 또 아톰이 못된 로봇을 무찌르면 대개 그 로봇이 산산조각나거나 손발이 망가지는데, 이것은 살인에 해당하므로 고쳐야겠다고 했습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라면 상관없지만 여기 등장하는 로봇은 걷고 말하고 생명까지 지닌 존재인데, 아무리 악당이라 해도 아톰이 때려부수는 것은 교육상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톰은 어린이 프로그램 프라임 시간대라 할 수 있는 토요일 아침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다음날인 일요일이면 어린이들이 교회에 가게 됩니다. 자신이 본 것을 목사에게 열심히 이야기해주면, 목사는 그건 사악한 만화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NBC측은 이런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아톰이 못된 로봇을 무수고 난 후에, 나중에 다시 조립해서 '내가 나빳어,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는 고칠 수 없어요!" 

 나는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또, 아톰이 악당을 감옥에 가두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악당들이 철창에 매달려 제발 용서해달라고 울며 애원하지요. 

 "철창이나 감옥은 어린이를 폐쇄적인 성격으로 만드니까 수정했으면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쇠사슬에 쇠공을 매달아서 다리에 묶으면 되지요," 

 나로서는 감옥이나 쇠사슬이나 그게 그거 같은데, 어쨌든 미국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덤을 그릴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나오면 일단 가톨릭으로 받아들입니다. 미국에는 개신교, 이슬람교, 불교신자가 모두 있지요. 십자가가 등장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채널을 돌려버려서 시청률이 떨어지니 어떻게 좀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무덤만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우주소년 아톰>은 뜨거운 호응을 받긴 했지만, 미국으로 보낸 200편 가운데 40편 정도가 되돌아왔습니다.  

 더욱 난감했던 것은 <밀림의 왕자 레오>였습니다. 이 작품의 무대는 아프리카로 당연히 흑인이 등장합니다. 콩 족이라는 흑인들의 마을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흑인을 모두 백인으로 바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니 그럼 흑인들을 모두 할리우드 스타처럼 팔등신으로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백인은 아무리 추하게 그려도 상관없다나요. 

 게다가 아프리카 각국의 사람들을 한데 묶어서 '흑인'으로 지정해도 안 된다. 각 나라의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한다. 전통의상 같은 것을 입는 것도 금물이며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그려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더이상 <밀림의 왕자 레오>가 아닌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 p.102~105 )  

 

 물론 지금 당장 '만약~라면' 하고 상상해보면 일단 암담한 상황부터 떠오릅니다. 하지만 미리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힘을 내 버티면서, 차라리 이런저런 어두운 상상을 전부 다 해버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거꾸로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하며 그 속에서 밝은 미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바쁜 나머지 그런 상상조차 쓸데없는 바보짓이라 여기는 어른들을 어쩌면 좋을까요? 언뜻 보기에 하찮은 일, 쓸모없는 일, 궤도를 벗어난 일도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쓸모없는 것, 멀리 돌아가는 것,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잠심 딴짓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풍요로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합리주의나 생산지상주의는 결국 그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때 묻지 않은 감성과 독창성을 지닌 어린이들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의 삶이 앞으로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과연 당신은 무엇을 할까요? 

 '만약 자녀의 목숨이 앞으로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요? 

 이는 언뜻 보기에는 너무도 어두운 'If'이지만, 그 결과 떠오른 생각을 몇십년 동안의 인생에서 조금씩 실현해나간다면 그 양상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조금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의 현실에서부터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서는 현실만 직시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본질을 발견해야 합니다. 개개의 사건과 상황에 상상력을 발휘해 깊숙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 상상력은 원대한꿈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 우리 이웃의 고민에 다다르게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민에 끼어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기 위해서는 따뜻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입니다.(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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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글,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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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누구나 유년시절, 모종의 철조망에 저항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아이들의 일상은 실제로 온통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탐험 그 자체이다. 전자오락가 TV가 단단히 그들을 포섭하면서 아이들의 탐험 또한 비상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타고난 야성을 길들이려는 부모와 이웃, 그리고 학교의 거대한 훈육 밑에서 조금씩 힘을 잃고, "부노미과 선생님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고, 그 후엔 거리의 무수한 광고메시지가 주입하는 대로 "부자"가 되어 더 많이 "소비"하는 착한 자본주의자가 되는 일에 긴 줄을 설 때, 우린 비로소 "이제 철이 들었다."는 덕담을 듣는다. (p.5)  
   

 경계를 넘는 다는 것, 궤도를 따라 도는 것, 어느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유로운척 했지만, 마음 속 불안을 감당하기 버거웠고, 태연한척 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들에 안달냈다. 욕심이 없는 척, 조건에 연연해했고, 이미 이탈한 궤도를 찾아가겠다고 꾸역꾸역 시들어갔다. 나 말이다.

 목수정처럼 맘껏 자유로운 영혼. 거침없이 당당한 여인들을 사랑한다. 그러면서 넌 왜 그렇게 찌질하냐고 물으시면, 아직 마음의 수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한다. 진심이다. 그리고 난 계속 이렇게 이상과 현실 어딘가에서 부유하게 될거라는걸 안다. 팔자다.

   
  우주 전체와 왕성하게 친구하며 지내는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릴 일이 없고, 천재적인 창조력을 무궁무진하게 발휘하면서 사는 것은 당연하다. 아침에 칼리가 눈을 뜨고 서서히 세상과 다시 접촉을 시작하는 과정을 보면, 그 동작 하나하나에서 무수히 금빛 조각들이 반사되면서 떨어진다. 그 광경은 언제나 생명의 눈부심을 일깨우고 이난의 신성을 투명하게 표출한다. 화분에 스프레이를 뿌릴 때는 "엄마, 꽃이 정말 맛있다고 했어."라고 말하고, 아가 변기에 떨어진 하트 모양의 스티커를 보고는 "엄마, 내 뱃속에 있는 하트가 똥으로 나왔나 봐."한다 (p.108-109)  
   

 인체의 신비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우주의 신비, 생명의 경이. 여성의 날을 선택해서 태어난 칼리를 주저없이 낳아 기르는 용기. 세상의 모든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창피해'란 단어를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철학. 그녀처럼 거꾸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뚝심이 필요하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정신적으로 풍성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나조차도 자녀양육의 부담은 만만치 않아서, 칼리는 '프랑스 시민'이잖아. 라면서 스스로의 결정을 위로할 따름이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은 출산파업이기에.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한 우물' 이데올로기의 강박으로부터 탈출이다.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금과옥조이다. 살면서 이 주장에 대해 감히 시비거는 사람 몇 못봤다. 그러나 한우물 파기 싫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그 우물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할 건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는다. 다행이도 자기가 처음 파기 시작한 우물에서 계속 재미있는 게 나오면 좋겠지만,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지조없이 연애도 많이 했고, 또 지조없이 여러 우물을 파면서 살아온 나한테는 언제나 이 경구가 마음의 짐이었다. 그걸 어느날 희완이 훌훌 떨치게 해주었다. 문학, 연극, 사진, 문화정책, 흙건축 참 난 너무 여러 우물을 파는 것 같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렇게 잠시 회의하고 있는 나에게 희완은 말했다. "얼마나 좋아.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거. 그리고 그걸 다 해볼 용기가 있다는 거. 그럼 너의 인생이 얼마나 풍요롭겠니." 오호, 그렇다. 관점을 전환하면 그렇게 된다. 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한 영역씩 맡아서 한우물을 죽어라 파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수도 있다. 난 이 거대한 사회의 나사가 아니다. 나 혼자서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구성할 수 있다. 여러 우물을 파면서, 세상의 모든 재미를 두루 즐기면서. ( p.163 )  
   

 눈물나게 감사한 일이다. '선택'과 '집중'이라고 말하며 금융권 입사에 성공한 친구는 1년 한번 휴가를 기다리며 한해를 버틴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옹색한 꼬라지의 나는 아직 못이룬 꿈이 있다며 1년의 반을 딩가딩가거리고 있다. 이솝우화에서는 베짱이를 기다리게 추운겨울이라고 했지만, 개미는 과연 겨울에 쉴 수 있는걸까? 풍요로운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내게 주어진 삶을 악착같이 챙기는 거다.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고, 그리고 스스로의 길을 긍정하면서.

   
  "넥타이 속의 남자는 절대 사귈 수 없어!"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연애 불가 상대의 기준이었다. 그 필터에 많은 남자들이 무더기로 걸러졌다. 내가 보기에 이 사회가 남성에게 허락하는 모든 악행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사람들, 단지 대세라는 이유만으로 우파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넥타이를 죽어라 매고 다녔다. 자신의 자아가 찌그러진 것도 모자라 가부장적인 위세로 세상까지 찌그러지게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도 넥타이를 소중하게 목에 걸어 매고 다녔다. 넥타이를 맨 대신 자유를 풀어버린 사람들이었다. ...... 예술적인 감수성은 있는 사람인가? 삶에 대한 열정은 충만한가? 지적인 욕망과 그가 쌓아온 지식의 창고는 어느 정도인가? 어린시절 부모와 충분히 애정을 교감했는가? 정치적 지향은 어떤가? 사고와 행동은 얼마나 일치하는가? 머릿속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미적 감각이나 옷 입는 취향은 만족스러운가?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외모인가? '멋있다'는 형용사에 가까운 사람인가? ( p.253-254 )  
   

 나의 이상형은 줄곧 바뀌었다. 어린시절 언변이 화려하고 몸가짐이 거침없이 기세등등한 날렵한 외모의 사람을 연모했다면, 또 한때는 단순하고 소박하면서 수더분한 사람이 좋았던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 서로의 삶을 긍정하며 조심스럽게 미래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마초의 경계를 살짝 넘어왔지만 차마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한, 깊게 사유하고, 따뜻하게 마음 쓰는 고운 사람이다.

 가부장제의 저격수를 자처하는 작가답게 결혼과 가정에 대한 비판은 통쾌, 상쾌, 유쾌하다. 우리의 취향이 구조조정 당하기도 했겠지만, 세상에서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배우자의 조건 또한 무시해버릴 수 없기에 머뭇거리는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이중성을 확인할 밖에.

   
  최근 들어 깨달은 좌와 우에 대한 가장 명확한 정의는 전자는 생명을 지향하고 후자는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조화로운 상생을 꿈꾸며 깨어있는 존재가 좌파라면, 텔레비젼 앞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일찌감치 자신의 영혼을 무덤 속에 파묻고 보수언론의 선동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 발전이라고 믿는 쪽이 우파다. 우파가 가장 싫어하는 좌파의 부류가 생태주의자라는 사실이 어떻게 우연일까.( p.290 )  
   

그런 전차로 나도 좌파였다.

   
  삶을 즐길 줄 모르면 좌파가 아니고, 하면서 신나지 않으면 운동이 아니다. 모든 엄숙주의와 모든 '묻지마 일벌레'들은 결국 위선으로 그 세월을 보답한다. 휴일도 반납하고, 밤잠도 안 자는 파란지붕집의 사람들이 엄청 사고를 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하다. 사람은 일하는 기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될 수 없듯이.( p. 309 )  
   

현재를 즐기자는 명제는 관념상에만 존재할 뿐, 대개 미래에 저당잡힌채 그냥저냥 살아가는 삶들이 태반이다. 그런 삶을 가엾다고 여기지도 못하고 오늘날의 밥그릇을 위협받는 것이 또 현실이다. 목수정은 옳았다. 우리가 거추장스러운 속박을 하나하나 벗어버릴수록 인생은 또 세상은 찬란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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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8-11-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읽지를 못했어요.
너무 잘난 사람 이야기일까봐 아직 선듯 손이 가지 않았는데 후기를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저도 요즘 간단하고 소박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중입니다.
 
게 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양희진 옮김 / 문파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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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첫문장이다. 지옥인줄 알면서도,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대표적인 계급주의 작가답게 직유적이고 솔직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계몽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계몽의 방식과 사회적 여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까닭에, 일본 서점가를 강타하고, 공산당원수의 증가에 일조했을 것이다.

 올여름 촛불집회가 아쉬웠던 까닭은 어렵사리 모아진 열망을 제대로 받아안아 실현할 정치집단이 없단 이유로 변화, 혹은 발전의 동력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화물연대가 미국산 쇠고기 운송을 반대한 파업으로 지지를 얻기는 했지만, 여타노동단체들에서 FTA관련 정치적 사안을 이슈로한 파업투표는 대개 부결된것으로 알고 있다.  엄격한 법적인 절차하에 집행된 철도공사의 파업이 '해고자 복직' '구조조정 저지'등 정치적 사안을 걸었단 이유로 멀리 타지에 계신 대통령이 몸소 '불법파업 엄정처단'을 강조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후쿠야마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운운하며 역사가 종말을 선언한지 10여년이 넘어가도 세상은 1cm도 희망도 보여주지 못한다. 나와 다른 삶의 조건하에 정서적 풍요를 만끽하는 프레시안의 북유럽 특집기사를 읽으며 겪어보지도 않은 사회주의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이때,  슬라예보 지젝이 가디언과의 인터뷰 말미에서 우리에게 알려준 비밀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란다.

 여하간에, 프로문학의 전형. 여러모로 다양한 의미부여에도 불구하고, 직유법을 좋아하지 않는 취향으로 별은 네개! 

   
 

 무전수는 다른 배의 교신 내용을 듣고, 그 어획량을 낱낱이 감독에게 보고했다. 보고에 따르면, 하쓰코호는 아무래도 다른 배한테 뒤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독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어업노동자와 잡일꾼은 전보다 몇 배나 센 노동 강도에 직면했다. 언제나, 그리고 뭐든지 막판에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감독과 잡부장은 일부러 '선원'과 '어업노동자, 잡일꾼'이 서로 일을 놓고 경쟁하게 만들었다. 똑같이 게 잡는 일을 하면서, '선원한테 졌다'고 하면, (자기들이 돈을 버는 일도 아닌데,) 어업노동자와 잡일꾼은 왠지 똥이라도 씹은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감독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오늘은 이겼다, 오늘은 졌다, 이번에는 절대로 안 진다고 하면서, 피를 머금은 듯한 나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날 하루 만에 오육십 퍼센트나 생산량이 늘었다. 그러나 대엿새 지나다 보면, 양쪽이 모두 맥 빠져서 일의 능률은 부쩍 떨어져갔다. 일을 하다가 자주 고개를 앞으로 떨어뜨렸다. 감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후려 갈겼다. 불시에 얻어맞은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다들 서로 경쟁사앧로 여기는지,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일했다. 잡담을 할 말한 여유가 없었다.

 감독은 이번에는 경쟁에서 이긴 조에게 '상품'을 주기 시작했다. 불에 잘 타지 않아 연기만 나던 나무는 다시 불이 붙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거야."

 감독은 이렇게 말하며, 선장실에서 선장을 상대로 맥주를 마셨다.  (p.72-73)

 
   

  친구 왈, 초등학교, 정교사와 기간제교사, 방과후 학교 교사의 공공연한 무시와 마찰이 빈번하고, 가르치는 내용도 뻔할텐데 은근한 서열이 존재하단다. 불필요한 경쟁, 노동자의 분화 1cm도 변하지 않고 세상은 반복되고 계속된다. 

   
 

 일본 영화는, 가난한 한 소년이 '낫토 장수', '신문팔이'에서 '구두닦이'를 하고, 공장에 들어가 모범적인 직공으로 일하다가 특별히 등용되어 큰 부자가 되는 영화였다. 변사는 대사엔 없었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참으로 근면이야말로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고 무엇이더란 말이냐!"

 거기에 잡일꾼들은 '진지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어업노동자와 선원들 가운데 이렇게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다.

 "거짓말쟁이! 그렇다면, 나는 벌써 사장이 돼 있어야 하잖아!"

 그러자 다들 크게 웃음보를 터트렸다.

 "저런 곳에선, 당신의 운과 힘을 모조리 쏟아부으라고, 되풀이,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회사로부터 명령받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회사 소속의 공장과 사무실을 비췄다. '근면'하게 일하고 있는 많은 노동자를 보여줬다. (p.113)

 
   

 정치적으로 나쁜 드라마, 에덴의 동쪽.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에서 자수성가 인생역전 스토리는 패배감만 극대화시킨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개인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 400여명의 인물을 선원과 어업노동자등 집단화시켜 서술한다. 처음에는 책읽는 진도가 더딘 까닭도 캐릭터화시킨 인물중심으로 소설을 읽던 습관탓이었다.  

   
 

 ".....들어봐, 가령 부자가 돈을 내서 만든 배가 있다고 치자구. 선원과 보일러공이 없으면 배가 움직일까? 게가 바다 속에 수억 있다고 하자. 만약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일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제아무리 돈을 냈다고 해도 게가 한 마리라도 부자의 호주머니에 들어가겠어? 그럼 우리가 여기서 한여름 일해서 대체 얼마나 수중에 돈이 들어오겠어. 그런데 부자들은 이 배 한 척으로 사실상 손에 넣는 게, 사오십만 엔이라는 돈을 착복하는 거야. 자 그렇다면 그 돈의 철처인데, 무에서 유가 된거야. 알겠어. 모두 우리의 힘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죽을 듯한 우울한 얼굴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더욱 힘을 내자구. 갈 데까지 가면, 거짓말이 아니야. 저들이 우리를 더 무서워한단 말이야. 벌벌 떨지 마. 선원과 보일러공이 없었으면 배는 움직이지 않아. 노동자가 일하지 않으면 동전 한 푼도 부자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수 없어. 배를 사거나 도구를 준비하는 돈도, 마찬가지로 다른 노동자와 피를 짜서 벌어준 거야. 우리한테서 착취해간 돈이야. 부자와 우리는 부모와 자식 같은 거야..."(p.155-156)

 
   

 정답이다. 뭉치면 힘이 세다. 뭉/치/면

   
 

 덧붙이는 말 중 세번째,
 그로부터 감독과 잡부장 등은, 어기 중에 파업 같은 불상사를 불러일으켜서 생산량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저 충실한 개는 '무자비'하게 땡전 한 푼 없이 해고당하고 말았다는 것 - 어업노동자들보다 더욱 비참하게도! 재미있는 일은, "아아 분하다! 내가 지금껏, 젠장, 속고 있었다!"하고 감독이 절규했었다는 것.(p.179)

 
   

 가장 코믹했던 반전이다. 공장선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던 감독, 진짜 적은 내륙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데, 저항의 대상은 눈앞의 상대적(!) 권력자를 향할 수 밖에 없다. 그 역시 회사에 복무하는 충실한 개였을 따름이라는 것. 이용가치를 소진한 후에 무참히 버려진다는 것. 이 사회 비정규직의 무능함을 탓하는 잘난 정규직, 혹은 관리직이거나 경영직. 그들의 최후도 다르지 않을게다. 


 덧말 : 하얀표지의 해적판으로 게공선을 읽었다는 쫑원씨, 정녕 2000년대가 보장하지 않았던 출판의 성역이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물론,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과 함께 더불어살고는 있기는 합니다만. 게공선 정식발행을 기념하며 손수 타이핑한 책을 은밀하게 건네셨다는 선배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도 찍어야 할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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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치 2012-07-2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번역되어있는것이 소설 내용에서 따온거라면 번역을 진짜 허술하게 했네요. 하쓰코호는 뭐냐. 핫코인데. 저따구로 번역해서 출간한다면 개나소나 번역가 되겠당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임경석 지음, 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한국근현대교과서 논란이 한창인 요즘이다.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에 이어 검정교과서 시비까지 MB파시즘의 촌스러운 수작은 "모든 금지된 것을 금지하라"는 낡을뻔한 반항의식을 고취 및 진작시키니 되려 고맙기까지 하다.

 이런 시국인지라 박헌영의 담백한 일대기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노골적으로 새빨갛게 공산주의자로 격동의 시기를 살아냈던 까닭으로 역사에 기억되지 못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제통치기간의 항일해방운동이야 지식인의 사명이었다 손 치더라도 해방이후 미군정 수장과 공식적인 회견을 진행하고, 진정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한 핵심 지도자중 한사람에 대해 우리역사는 그 이름 석자 한번 제대로 알려준적이 있던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원하며 반탁운동의 입장을 견지했던 백범김구에 대해서는 열렬하게 환호하면서, 김구가 임시정부란 간판을 달고 안전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한반도 지하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독립을 위해 애쓰던,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민중들에게 사랑받고 지지받았던 이정박헌영에게는 어찌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없다 할 것인가.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거세하고 반쪽짜리 역사만 바로세운다고 한들 그게 이 땅의 역사라 할 수 있을가. 역사적 사실은 분명히 하고, 그 이후에 스스로 판단하게 될, 그 결정이 뭐가 그리 두려워서 애써 부정하기 급급한지는 숨겨야 할 사람이 분명한 그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세번의 결혼과 월북후 총살, 배다른 오누이의 드라마틱한 상봉까지 극적인 요소를 두루갖추고 있는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주변인물들의 증언과 객관적인 신문자료, 공문서의 기록등을 통해 서술자의 감정적 개입없이 기술된 건조한 글은 갖가지 형용사로 포장해서 인위적으로 강요하는 감동 이상의 울림이 있다. 인물의 무용담 위주로 개인을 미화시키는 위인전 방식은 실제 비범치 못한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시킬 따름이며, 과도한 영웅주의로 맹목적인 믿음을 추동하는 요소중 하나이다. 맨손으로 호랑이라를 때려잡았다는 북조선의 위대한 아바이 수령과, 그의 죽음앞에 통곡하는 인민들은 흡사 세상의 무너지는 날을 준비하는 종말론자들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건 이미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믿음의 광기일 따름이다. 이 책은 박헌영이라는 중간정도 성적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학생이 우여곡절 많은 삶을 살다가 천신만고 끝에 죽어가는, 그 시대에 대한 성실한 기록으로서 더 많은 의미가 있다. 위인전에서 강제하는 교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에 대한 연민이 짙은 것도 책의 서술적 특징으로 가능했다.  

 박헌영을 아는 것과, 그를 따라 공산주의 혁명에 자신의 생애를 던지는 것은 구별해야 할 판단이다. 그가 실제 미제의 간첩이었는지, 우리는 추가로 밝혀지는 사실들을 통해 알 수 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조금 더 면밀하게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이며,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잊혀지고 묻어두고자 하는 약자의 역사일수록 우리의 역사관을 명료하고 분별있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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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전두환 - 전2권
백무현 글, 그림 / 시대의창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열다섯살의 사촌동생은 모든 종류의 지식을 '만화'로 흡수한다. 흡사 얼렁뚱땅흥신소의 용수마냥 얇고 방대한 지식으로 온갖 종류의 고전과 한국사를 꿰고 있지만 줄글로 되어있는 책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만화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출판물을 접하지 못한다는데 그 일차적인 한계가 있고, 구체적인 맥락을 통해 이해하는게 아니라 이미지컷의 연결로만 단련된 학습능력이 심히 염려스럽긴 하지만 그나마 '안다'라는 사실이 본인에게는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그래, 그나마 알기라도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화 전두환'은 반갑다. 80년의 5월과 87년의 6월조차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무척 못마땅했지만, 어떻게든 그들이 알도록 도왔어야 했다. 전재산이 29만원이라는 그가. 그의 호를 딴 일해공원이 만들어지는 이 시대가. 죄 지은 자를 벌하지 못하는 이 땅에. 분노를 잃은 내가 산다. 

 한 장의 그림으로 '풍자'를 담아 '메시지'를 전달하는 만평가 백무현씨는 서문에서 전두환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한 포털 싸이트에서 그는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은 '제12대 대통령'이라는 연대기만 기술되었을 까닭이다. 맥락을 잃고 부유하는 글자로 전두환을 '알 수 있을까'

 구전소설마냥 은폐되지 못한 80년대의 이야기가 소설과 영화로 재현되고, 나의 것이 아니었던 그때의 뜨거움은 항상 목이 메인다. 애써 직선제를 쟁취해냈던 들풀에 대한 부채감이기도 하며 여전히 '불의'는 죽지 않는다는 무력감이기도 하다.

 내 서재에서 '인물'을 다룰 카테고리의 첫장이 '땡전뉴스'의 주인공인것은 유감이지만, 그 사람에 대한 불편한 사실들을 끝끝내 '기억'해 내야 한다는 사명이기도 하다.

 사족하나 - 청문회에서 명패를 집어던진 노통의 까메오 등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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