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안개 정원 퓨처클래식 5
탄 트완 엥 지음, 공경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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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이 책의 소개글을 보다가 이 문구가 맴돌아서 그만 이 책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의 아픔을 장엄한 서사로 치유하다"

이 책의 작가는 말레이시아 대표작가 '탄 트완 엥'씨로 그의 작품은 저에게는 처음 접하게 되었지만 그의 문체는 저의 심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책의 문구처럼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간직한 기억과 망각의 조각들을 조금은 덤덤하듯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렇기에 더 설득력이 있었고 이들의 아픔이 절절하게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책의 두께가 무색할만큼 흡입력이 있었던 이 책.

책의 첫 장부터 전쟁 후 36년 세월이 지난 그들의 과거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본군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끔찍한 고통을 받고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테오 윤 링'과 한때 일왕의 정원사였지만 윤 링의 부탁으로 언니를 위한 정원을 남기고 많은 베일을 품고 떠난 '나카무라 아리토로' , 이 두명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전쟁에 대한 기억과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도 일제 강점기라는 우리와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빠져들고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에 몰입을 하며 가슴 졸이며 때론 아파하며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비인간적인 역사의 모습은 이 책에서도 여실히 들어났었습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가상 세계로 도망쳤어요. 어떤 사람들은 꿈꾸는 집을 짓거나 요트를 만드는 상상을 했어요. 상상할 수 있는 세세한 부분이 많을수록 우리를 에워싼 공포감에 더 멀리 벗어날 수 있었지요. '셀' 정유사의 네덜란드 기술자 부인은 수집한 우표들을 다시 보고 싶어 했어요. 그 바람이 그녀에게 계속 살아갈 의지를 주었죠. 어떤 남자는 고문을 당하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을 모두 반복해서 암송했어요. 희곡이 집필된 순서대로 외웠죠."

목구멍이 말라버려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윤 홍이 방문했던 교토의 정원을 떠올리며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이야기한 덕분에 우린 온전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언니는 내게 말했죠. '우린 이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할 거야. 이게 우리가 수용소에서 걸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이야." - page 91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그들의 모습.

우리 민족의 모습과도 너무나 닮았기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차마 다음 장을 바로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모든 것을 포용한, 그렇기에 더 아름답고도 슬픈 그의 모습이 비추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울고 웃으리라. 오랜 친구만이 그럴 수 있다. 저녁이면 나는 산속을 거닐 것이다. 아 청이 현관문에서 기다리다가, 아리토모의 지팡이를 건네겠지. 물론 나는 그것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지팡이가 필요 없다고 말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안다.

내 앞에는 머나먼 여행길이 놓여 있고, 기억은 내가 길을 밝히려고 빌리는 달빛이다.

첫 햇살 속에서 연꽃이 벌어진다. 내일의 비가 지평선에 걸려 있지만, 높은 하늘에서 작고 여린 뭔가가 내려와 땅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진다. 나는 연못을 맴도는 왜가리를 본다. 나선형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왜가리는 정원에 고요한 잔물결을 일으킨다. - page 582


'전쟁'이라는 상처도 세월의 흐름에선 어느덧 흔적은 남지만 새 살이 돋아나 그 자리를 메워주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의 '윤 링'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제목에서 주는 이미지인 해 질 무렵 안개 정원.

그 정원에서 그저 바라만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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