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조들에게 부디 그 아이가 조금 더 이른 때에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철쭉 왕조가 아직 쇠락하기 전, 병들어 죽어 가는 지금의 황제가 왕좌에 오르기 전 언젠가.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아직 선했고, 갓 태어난 아기들이 원인 모를 기근 때문에 죽어 나가지 않던 시절이기를 빌었다.
지금보다 이른 시대, 그게 아니라면 더 나중이라도 좋았다. 왕조도, 황제도, 왕좌도, 기근도 전부 아득한 옛날 일이 되어 버린 뒤에. 바로 그런 때에 제비고깔이 다시 태어나길 바랐다. 가난한 아이들도, 여자아이들도, 모두 다 글을 배울 수 있는 시대에. - page 11
'인 웨이'
벌써 다섯 번째 자신의 여동생 제비고깔을 묻으며 부디 다시는 굶주릴 일 없는 곳으로 제비고깔을 데려가 달라고 빌어봅니다.
새해가 되면 궁궐 사람들이 우리네 도시로 찾아와 백성들에게 마법의 힘-논밭이 기름지고 무성해지도록 돕거나, 오두막집에 모기가 얼씬대지 못하게 해 주거나, 흙색 열병에 걸린 아이를 낫게 해 준다는 한두 마디 금언-을 나눠주는데...
솔직히 가망이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남동생 바오의 간절함에 도시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이산 황자가 공표를 하게 되는데...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최근에 아버지께서 후계자를 바꾸셨다. 철쭉 황실을 이을 후계자는 더 이상 맏형 마로가 아니라, 둘째 형 테렌이다. 새로운 후계자로서, 테렌 황자는 지금 후궁을 선발하는 중이다. 열다섯 살에서 열아홉 살 사이의 지원자는 일주일 뒤 정오에 이 광장으로 전부 모여 심사를 받도록 하라." - page 22 ~ 23
사실 테렌 황자의 잔혹함을, 살가죽을 벗기거나 개들을 도살하거나 혓바닥을 자른다는 등의 소문이 있었지만 그보단
대신 배불리 밥 먹고 푹신한 침상에 잠드는 나날을
더는 어린 여동생들을 땅에 묻을 일 없는 삶을
엄마의 핼쑥한 뺨에 살이 오르고, 아빠의 통증이 나아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테렌의 후궁이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엄마, 다 잘될 거야. 정말로."
축하해야 할 밤에 엄마가 왜 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이산 황자의 복숭아나무도 생긴 데다, 또 하나의 축복은 바오가 받았고, 나는 어쩌면 후궁이 될지도 모르는데.
엄마는 슬픔에 잠긴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 겨우 침을 삼키며 속삭였다.
"그 사람이 널 헤치면 어떡하니? 널 죽이면?"
나는 눈을 깜빡였다.
"테렌 황자 말이야?"
그 이름에는 잔혹함과 죽음에 대한 소문들이 늘 따라붙었다.
"조심할게, 엄마. 아무튼 나는 엄마랑 아빠가 키운 아이잖아. 그것도 아주 똑똑하게 키운 아이라고."
엄마가 그 칭찬을 듣고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길 바랐다.
"있지, 꼭 안 가도 돼."
엄마가 떨어진 꽃잎처럼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 page 31
황자 테렌의 후궁이 된 웨이.
궁궐 안 그 누구의 눈총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아무 때나 불러들일 수 있었기에 테렌은 웨이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습니다.
그러면 웨이가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견뎌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러다 심혼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인 마마, 심혼시는 아무 문자술사나 막 써낼 수 있는 주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주문들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한 축에 들고요. 뭐, 살상 주술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연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단 말이죠. 진심을 온전히 담아야 하기에, 작자가 아주 깊이 아는 상대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주문이에요. 말씀해 보세요. 누가 사랑의 시를 쓸 만큼 우리 황자 전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편이 낫겠네요." - page 154
아름다운 얼굴로 죽음을 명하는 폭군 테렌이 황제가 되는 순간 세상에 들이닥칠 파멸을 예감하게 되어 웨이는 테렌을 죽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의 심장을 꿰뚫을 '완벽한 시'를 짓는 것, 바로 심혼시를 지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과거를 알고, 고통을 이해하고, 마음에 공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를 사랑해야 하는데...
죽이고 싶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 상황...
과연 웨이는 시를 완성할까...?!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 말해 줘요. 왕조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는데, 난 그저 평범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걸 아무도 몰라 주네요."
...
두 호는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자 몇 자를 눌러썼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녀가 긴 세월을 사는 동안 마음속에 쌓아 두었다가, 마침내 전해 줄 기회를 찾은 지혜의 문장.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하는지 기억하면 길을 잃지 않을 거야. - page 686
비록 가난한 시골 아이일지라도 장차 위대해질 수 있다고 알려주었던,
읽기와 쓰기가 금지된 세상 속에서도 글을 배워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그리고 작가 션 타오가 전했던
"저는 끊임없이 자문했어요. 과연 무엇이 언어에 진정한 마법의 힘을 부여하는 걸까 하고요. 그 답은 '공감'과 '친절'이었습니다. 저는 공동체를 돌보는 마음처럼 전통적으로 '여성적'이라 치부되던 덕목들이 결코 약점이 아닌, 세상을 바꿀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 힘은, '당신을 이해할 수 있고, 당신에게 공감할 수도 있지만, 당신이 저지른 잘못까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 단호함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되 폭력을 용서하지 않는 단호함,
가혹한 운명 앞에서도 나만의 문장을 자아내는 주체성,
강인한 불꽃과도 같았던 웨이의 모습은 저에게도 튼 울림을 선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이 문장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하는지 기억하면 길을 잃지 않을 거야.
는 가슴에 새기며 저도 앞으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