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가 '박영택'은
1910년 조선의 붕괴부터 1958년 현대미술의 태동까지
이 땅에서 생산된 다양한 '시각이미지'를 대상으로 하여 작품 해석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는데...
우선 1910년부터 1958년까지로 시기를 설정한 이유는 이 시간대가 한국 근대 미술기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전히 한국 근대미술의 시기 설정 문제에 대해선 논쟁적이지만...
1910년경부터 일본을 통해 서구미술을 수용하고 다양한 시각이미지가 출현함과 동시에 미술문화가 자리 잡아가는 시기가 근대미술의 시작점이라고 보고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해방과 해방 공간 그리고 한국전쟁과 휴전 등의 시대적 질곡을 지나며 어느 정도 미술계가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가 대략 1950년대 후반으로 보이기에
1910년에서 1958년 이전까지 한국 근대 미술기에 해당한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각이미지라 한 건 순수미술 작품만을 다룬 그간의 시각과 차이를 두려는 의도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의 붕괴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다양한 서구의 시각이미지가 유입, 산포되면서
신문에 실린 사진과 만평, 광고 그리고 각종 출판물의 표지와 삽화, 사진 등 일반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전통적인 시각문화와는 다른 서구식 시각 기제를 익히게 한 매개들로 당대 사람들의 감수성과 사물과 세계를 보는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에
이를 미술 작품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이들의 다양한 작품-특히 미술 영역이 확장되어 책 표지, 신문 만평, 조각, 사진 -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라 하면 우울하고 비극적인 작품들만 있을 것이라는 제 편견을 깨주었고
이 시기에만 접할 수 있었던 느낌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어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포문을 열어준 건 이도영의 「배우창곡도」였습니다.
1910년 4월 10일자 「대한민보」에 실린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로,
치욕스런 한일 합병을 앞둔 시점에 그림과 문자를 통해 국권의 존망이 위태롭던 당시 상황에 대한 경각심과 국권 회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 날카로운 정치풍자화는 당시 신문 구독자들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동시에 이미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중요한 인식 전환을 가져왔고 1910년 8월 31일 「대한민보」가 폐간당할 때까지 이도영은 꾸준히 시사만화를 그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