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공허에 관한 전통적 이야기와 생각을 담고 있었습니다.
불교의 '무(無)', 노자의 '무위', 기독교의 '케노시스' 등 동서양의 사상과 일상의 일화를 엮어 침묵과 공백의 힘을,
반지 없는 손가락, 화살 없는 활, 텅 빈 좌석 같은 상징적 이야기들을 통해 공허가 삶에 불어넣는 자유를 그려내며, 채움보다 비움을 통해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마음을,
그렇게 저자는
우리는 공허의 진가를 인정하고 일상적 경험으로 삼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바쁘게 돌아갈 때도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나치게 많은 일을 벌이거나 과도하게 생각하고 느끼려는 경향을 균형 있게 조절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공허를 포함하면 일상생활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찾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공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삶의 모든 순간을 활동이나 설명이나 목적으로 채우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압박에 맞서야 합니다. 먼저, 과도한 활동을 부추기는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세요. 그런 다음,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둘 때 찾아오는 평온을 즐기세요. - page 18 ~ 19
공허가 전하는 충만한 위로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도덕경》의 '바큇살' 이야기를 듣고 그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었습니다.
바큇살 서른 개를 꿰는데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 바퀴가 굴러가네.
흙으로 그릇을 빚는데
속이 비어 있어야 그릇으로 쓸모가 있네.
문과 창문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이러한 구멍이 있어야 살기에 적합하네.
그러므로 있어서 이로운 이유는 빈 부분의 쓸모 때문이네.
노자, 《도덕경》
삶을 온갖 것들로 가득 채우면
새로운 발견을 할 수도 없고
놀라움과 깨달음도 드물며
삶을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줄 방법을 익히지 못하기에
'비어 있음'이야말로 진정한 충만함과 자유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저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건 '자연스러움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누가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물으면, 굳이 좋은 인상을 주거나 동정을 얻으려 하는데...
이에 대해서
결과를 통제하거나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간섭을 떨쳐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세요. 별 뜻 없이 상투적으로 내뱉는 말도 피하면 좋습니다.
"대체로 잘 지냅니다. 다만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피곤하고 세계정세 때문에 슬프다는 것만 빼면요."
감정을 분명히 드러내는 '피곤하다', '슬프다'라는 형용사에 주목하세요. 여기에선 이 두 단어를 복잡하게, 혹은 혼란스럽게 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다른 의도대로 보이려고 친구를 조종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공허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조작과 불필요한 복잡함이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친구는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있습니다. 상호작용에서 흔히 보이는 교묘한 속임수와 통제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실제로 당신의 말에서 공허를 감지할 수 있으며, 그 공허는 신선하고 신뢰감을 줍니다. - page 66 ~ 67
그동안 너무 힘을 주고 살아 힘겨웠을 제 자신에게
느끼는 대로, 의도한 대로 말할 것을
나머지는 공허한 상태로 둘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해 봅니다.
치열한 경쟁 속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 긴장감은 팽팽한 줄이 되어 스트레스로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한순간 툭!
한꺼번에 '번아웃' 상태가 되어 자신을 잃어버리기 전에
잠시 숨 한 번 크게 쉬고 공허에 귀를 기울여볼 것을,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갈 것을 저자로부터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잠시 명상을 통해 내 안에 작은 틈을 만들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