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회상으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천천히 회상하며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첫 이야기부터 인상적인데...
어린 시절은 그 나름의 비밀과 경이로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누가 그걸 적절히 표현할 수 있으며 그 뜻을 풀어서 해석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이 고요한 경이의 숲을 지나왔다. 한때 그 지극한 행복감 속에서 눈을 떴으며, 인생의 아름다운 현실은 밀물처럼 밀려와 우리의 영혼에 흘러넘쳤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때는 온 세계가 우리의 것이었으며, 우리는 온 세계의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영원한 삶이었다. 시작도 끝도 없고, 정지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삶이었다. 우리의 마음속은 가을 하늘처럼 맑았고, 제비꽃 향기처럼 신선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처럼 고요하고 거룩했다. - pageg 9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과 인자하면서도 엄했던 아버지의 눈빛
정원과 포도 덩굴과 연초록빛 잔디와 오래된 귀중한 그림책들
그 이후부터 갈수록 선명하고 밝아지는
숱한 이름과 여러 사람들,
낯선 타인들에 관한 수많은 것들...
이처럼 인생의 봄날을 회상하고 추억에 잠기게 되는데...
불쌍한 인간의 마음이여! 봄이 다 가기도 전에 너의 잎은 꺾이고, 날개의 깃털마저 뽑히는구나! 인생의 새벽안개가 영혼의 그 은밀한 꽃받침을 열어 주면 그 내부는 사랑이라는 향기로 가득 찬다.
우리는 서고 걷는 것, 말하고 읽는 것 등을 배운다. 하지만 누구도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사랑이란 우리의 생명과 같아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우리 존재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 page 21 ~ 22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별하는 관념, 돈의 개념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순진한 목사의 아들 '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지체 높은 후작 부부의 성에 가게 되었고
그곳을 드나들며 그들의 자녀들과 어울리며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
몸이 허약해 늘 침대 신세를 졌고 말이 없던, 사별한 전처 소생의 '마리아'가 자신의 생일이자 견진성사를 받은 날
"나는 언제까지라도 너희들과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러나 내가 언제든 너희들과 헤어지게 되더라도 나를 아주 까맣게 잊진 말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여기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끼워 줄 반지를 가지고 왔단다. 하나씩 나누어 줄 테니 집게손가락에 끼워 줘. 이다음에 너희들이 자라거든 차차 손가락을 옮기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에 꼭 맞게 될 때까지 끼고 있어 줘. 일생 동안 그 반지를 꼭 끼고 있어 줘, 응?" - page 33
이복동생들에게 반지를 나눠주곤 자신이 죽을 때 끼고 가려고 남겨둔 마지막 반지를 나에게 건네줍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가 내게 반지를 준 것은 그녀로서는 희생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는 그 반지를 무덤까지 끼고 가고 싶었으리라 생각이 들어
"이 반지를 내게 주고 싶거든 네가 그대로 갖고 있어. 네 것은 다 내것이니까." - page 36
학창 시절은 어느덧 지나가 버리고, 대학 생활 초기의 멋진 시기도 다 지나가 버리고 여름 방학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나.
마리아로부터 서신을 받고 재회하게 된 이 둘.
여전히 그녀는 누워있지만 나를 바라보며 다정다감하게 대하며 매일 저녁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잠시...
다음 날 아침 누군가가 나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이 도시의 모든 이들을 돌봐온 노의사가 나에게 다가와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군.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말게나.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네. 한 가지만 말하고 가겠네. 자네, 다시는 마리아 공녀님을 뵈러 가서는 안 된다네. 어제 밤새도록 공녀님을 돌보아야 했는데, 그건 자네 탓일세. 그분의 생명을 아깝게 생각한다면 절대로 다시 가서는 안 돼. 그분은 가능한 한 빨리 시골로 전지 요양을 떠나야해. 자네도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먼. 자, 그럼 난 가 보겠네. 내 말을 명심하게." - page 92
그녀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니...!
미친 듯 상념들이 떠올라 낙담 끝에 여행을 떠나게 되고
여행을 하면서
만약 내가 그녀와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마지막 순간조차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나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보낸다면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저승까지 따라가, 그녀가 나를 사랑하며 나를 용서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인간은 어찌하여 삶이란 것을 장난으로 여긴단 말인가. 어찌하여 하루하루가 자신의 최후가 될 수도 있으며, 시간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영원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과 향락할 수 있는 최고의 미를 하루하루 뒤로 미룬단 말인가. - page 107 ~ 108
작별 인사도 없이 그녀를 보낼 수 없다는 결심에 그녀가 머무는 성으로 찾아가게 되고
그녀에게 그동안 내가 찾아갈 수 없었던 이유를 말하며 사랑을 고백하지만...
"우리들의 천사는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네. 여기에 그녀가 자네에게 남기고 간 마지막 인사가 있네."
그 말과 함께 그는 편지 한 통을 내게 주었다. 거기에는 언제인가 그녀가 내게 주었고 내가 다시 그녀에게 돌려준 반지가 들어 있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라고 새겨져 있는 그 반지가.
반지는 오래된 종이로 싸여 있었는데, 그 종이 조각에는 어린 시절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씌어 있었다.
'당신의 것은 내 것입니다. 마리아.' - page 163 ~ 164
신에 대한 겸손과 믿음으로 완전한 사랑을 구하게 된 그들.
결국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만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이 사랑은 이제 한 여자에 대한 사랑에서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하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
"당신은 왜 나를 사랑하나요?"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냐고요?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들판에 핀 꽃들에게 왜 피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 page 161
섬세하고도 아련하게 그려졌던 이들의 '사랑의 본질'
책을 읽고 나니 우리의 황순원의 『소나기』가 떠올랐습니다.
순수한...
아가페적인 사랑...
잠시 저에게도 잊혔던 그 감정들이 올라와 뭔가 치유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감정...
한동안은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