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아주 옛날, 비가 내리는 날.
인간의 욕심으로 물든 세상을 본 신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방울
두 방울
그 눈물은 곧 거대한 심판의 비가 되었고
점점 세상은 물에 잠기고 있었는데 그 속에 하나의 순수한 빛 N이라는 인물을 발견하게 된 신은
"N이여. 방주를 지어 모든 생명을 한 쌍씩 그 안에 싣거라."
비가 그치고, 햇살이 새 땅을 비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납니다.
동물들의 털과 깃이 반짝이며 빛나더니, 팔다리가 인간의 형상을 띠기 시작한 축복받은 존재,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선 '수인'이라는 존재가
옷을 입는 동물이라는 의미의 '금수'로 불리기도 한 이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로부터 4천 년 후,
인간의 후손들은 수인들보다 그 수가 적었지만, 지혜와 기술로 세상을 바꾸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영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산업혁명의 심장, 영국 런던 리틀페어 가의 낡은 골목 한켠에 양복점 '토퍼스'에 재단사 'W'가 살았습니다.
이 거리 유일한 N의 후손, 인간인 그는 한 번 본 수인의 몸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체상기억능력'을 활용해 수인들의 옷을 만들어내는 솜씨에 늘 북적였습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신은 찬란한 문명 위에 또다시 새로운 심판을 내리게 됩니다.
이번엔 폭풍우가 아닌,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의 모습으로, 동물들은 이 추위를 '빅 슬립'이라 불렀는데 이로 도시 전체가 마치 깊은 겨울잠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심판에서, 일개 인간 재단사는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계절은 어느덧 봄 문턱에 다다랐건만, 여전히 소빙하기에 걸쳐 떨어진 기온은 템스 강뿐만이 아닌 런던 사람들의 생활도 얼어붙게 만들었고, 플랜시를 비롯한 런던 전역에 '빅 슬립'이라는 증후군까지 남겼습니다.
그런 추위와 무기력에 빠진 수인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전대미문의 <의복 경연 대회>가 개최된다고 합니다.
이 도시의 유일한 인간 재단사 W에게도 초대장이 도착하고
그는 고양이 햇메이커 '올리버', 곰 슈메이커 '제이콥'과 함께 팀 '토퍼스'로 경연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들을 기다린 건 예민한 피부의 하마,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리트리버 소녀, 다리 콤플렉스를 가진 치타,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새,
종도 취향도 제각각인 모델들과 난해한 주제였습니다.
인간이라는 이유로 차가운 시선을 받는 W.
4개의 팀
4개의 라운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무대 뒤에서는 반인간주의 조직 '리그레서'가 인간이 만든 옷을 거부하며 경연을 방해하는데...
W와 동료들의 고군분투 속 이들의 옷은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고 웃음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
"자신을 잃어버린 채, 규정된 행복만을 좇지 마십시오. 수인과 인간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우리의 진정한 근본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멋진 옷을 입고, 당당히 거리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길을 걸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를 등에 새기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우리가 이 무대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입니다." - page 400
사람과 동물이 그려낸 따뜻한 패션 판타지.
간만에 어른 '동화'같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었습니다.
아무래도 감동을 선사하는 디테일들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에 화려하면서도 따뜻함이 묻어있었던...
읽고 나서도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근본'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해 주었는데...
"근본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장 제일 잘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전통과 책임? 대중성? 혹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고자 하는 노스탤지어일까요? 여러분, 제 대답은 다릅니다. 진정한 근본이란, '우리가 누구인지 선택하는 자유'에 있습니다.
오늘 이 무대에서 여러분이 보신 경연 대회의 옷은 단지 몸을 감싸는 천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멋진 옷을 입고 나와, 그 길 위를 걷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그것이 진정한 근본입니다." - page 399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각자의 자유를 재발견하는 것이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툭하면 우리 역시도 '근본'을 외쳐대는데...
그 근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좋아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던 이 소설.
그들 덕분에 저도 이 소설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영상화해도 멋질 것 같은...!
이제는 19세기 유럽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제 의상...!
새삼스레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