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나는 셜록 홈스 씨의 허가를 얻어 그가 조사한 사건의 기록을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에 발표해왔다. 교토 안팎의 탐정소설 애호가들이 그의 모험담에 열광해 명탐정 셜록 홈스의 명성이 만천하에 자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셜록 홈스는 천재였다. - page 7
데라마치 거리 221B번지의 하숙집.
홈스담이 실린 《스트랜드 매거진》이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이곳으로 밀려든 의뢰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뭐!
그의 명성은 셜록 홈스 혼자만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닌,
나, '존 H.왓슨'이라는 사실
을 알아준다면 좋겠지만...
셜록 홈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사건에 푹 빠져 있었고
왓슨은 메리 모스턴 양과 결혼해 염원하던 진료소를 시모가모 신가 부근에 개업하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풀리는 바람에 이들은 그만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으니...
"이상한데. 하늘에서 내린 재능은 어디로 갔지?"
어느 시점에서 시작됐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홈스는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그러다 '붉은 머리 연맹 사건'이라는 크나큰 실패가 셜록 홈스를 완전히 재기 불능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데라마치 거리 221B에 틀어박혀있는 홈스...
그런데 그 윗집에 이사 온 '모리어티' 교수.
그 역시도 슬럼프에 빠져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심정은 잘 압니다. 저도 같은 문제를 갖고 있거든요."
모리어티 교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귀군도 슬럼프라고?"
"현재 인생 최대의 난해한 사건과 씨름 중이죠."
홈스는 모리어티 교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습니까, 교수님. 힘을 합쳐 이 수수께끼에 맞서보지 않겠습니까." - page 66 ~ 67
왓슨은 홈스가 슬럼프에서 나오도록 그토록 애썼지만 이젠 모리어티 교수와 함께 '자기 자신'이라는 난해한 사건과 씨름한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현실을 똑바로 보지 않는 사람은 자네지."
"우리는 슬럼프라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어."
"그게 현실 도피라는 소리야."
"슬럼프를 받아들이는 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네. 용기 있게, 차분히, 인생의 근본 문제에 맞서는 것이지. 그런데 자네는 '일을 해라', '사건을 해결해라', '존재 가치를 증명해라' 하고 잔소리만 해. 나한테 묻는다면 현실 도피를 하는 사람은 자네야. 그렇게 나를 몰아세워서 자기 문제를 외면하려 하고 있어."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 page 84 ~ 85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맞은편에 떠오르는 명탐정 '아이린 애들러'가 탐정사무소를 차린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대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물론이죠."
"이거야 원, 자신감이 참 대단하시군요."
"홈스 씨, 어째서 사건을 조사하지 않는 거죠? 교토 경시청은 여전히 무능하고 지난 1년간 미제 사건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당신은 사건 해결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어요. 탐정의 기개를 잃은 거라면 셜록 홈스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뜻이죠. 앞으로는 제 시대입니다." - page 94
그러고는 홈스에게 도발을 하는데...!
아이린 애들러 씨, 도전장을 던지다
궁지에 몰린 셜록 홈스 씨
'명탐정' 칭호는 누구 손에? _ <데일리 크로니클>
그러다 이들 앞엔 머스크레이브 가의 '동쪽의 동쪽 방'이라는 풀리지 않았던 사건이 있었고...
사건은 명쾌하게 풀리기는 커녕 그저 시간의 흐름에 맡긴 듯하게...
그리고 홈스는 '은퇴 선언'까지 하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어?!
소설의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셜록 홈스에게서 명탐정의 힘을 빼앗기 위해 자네는 빅토리아 시대 교토라는 세계를 지어냈을 테지. 홈스는 무엇때문에 슬럼프에 빠졌나. 그건 이 세계의 원리 그 자체라 따져봤자 의미가 없는 물음인 거야. 그게 작가의 의도느까 등장인물들은 어떻게도 할 수 없어. 따라서 셜록 홈스의 '개선' 따위 있을 수 없네. 홈스가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빅토리아 시대 교토란 불멸의 왕국에서 자네는 언제까지고 메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 터였오. 안 그런가?" - page 406
존재하지 않는 시대와 장소
교차된 관계
현실과 이세계
작가와 독자
셜록과 왓슨
이 두 세계 속에서 '서로'를 구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그려지는데...!
익숙하지만 낯선,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었던 이 소설.
셜록 홈스와는 최대 숙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리어티' 교수를?
셜록 홈스가 슬럼프에 빠진다고??
무엇보다 셜록 홈스 이야기라면 홈스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이 소설은 왓슨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니...!
맞물린 두 세계 속 묘한 이질감이 짜릿함과 함께 소설을 더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창작의 슬럼프를 겪었던 작가님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던" 고통의 시간과 휴식기를 거쳐 7년여의 시간을 들여 완성했다는 이 작품.
아마 홈스의 심정이 작가님의 심정이었고
"홈스가 슬럼프에 빠진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전 홈스만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매번 홈스에게만 맡겨뒀죠. 어떤 수수께끼가 우리 세계를 위협해도 그 친구가 꼭 질서를 되찾아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명탐정의 역할이니까요."
"홈스는 그런 책임을 혼자서 도맡아야 하는 상황에 넌더리가 난 겁니다." - pageg 237
고독했기에...
그럼에도
작가에 의해 창조된 순간 작중인물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며, 독자의 손에 닿는 순간 그 세계는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셜록 홈스의 개선』은 그렇게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함께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가 된다. - page 499
"왓슨이 있기에 홈스가 있다"는 외침처럼 작가와 독자는 서로를 격려하기에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됨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일까.
원래 셜록 홈스 이야기를 읽고 나면 사건 해결의 짜릿함이 있는데
이 소설은 읽고 나서 뭉클함이 있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앞으로의 작가님의 행보를 기다려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셜록 홈스 시리즈를 읽으며 이 소설과의 간극 속에서 묘한 균형을 느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