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을 열자 7월 초순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발밑으로 밀려들었다. 장마철 하늘은 어둠침침하게 가라앉았고, 요새는 비가 오다가 말다가 하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전 10시. 나는 대출 고객을 방문하기 위해 은행 건물 뒷문을 나와서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 page 9
대형 은행에서 융자 담당으로 일하는 평범한 직원 '이기 하루카'.
외근을 나가던 중 낯익은 통통한 뒷모습이 걷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카모토!"
"뭐야, 이기였어?"
평소 같으면 튀어나왔을 농담 한마디 없는 사카모토.
"있잖아, 이기."
걸으면서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갑자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너 나한테 빚진 거다?" - page 11
묘한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는데 몇 시간 후 시체로 발견됩니다.
사인은 알레르기로 인한 쇼크사.
동료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 사카모토가 고객의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용도를 생각한들 뭐가 돼. 어디 은행에나 부정은 있지만 훔친 돈을 교육비에 썼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도박, 여자, 세상에는 마음만 먹으면 3천만 엔쯤 쓸 방법은 얼마든지 있거든. 하룻밤에라도 쓸 수 있지."
"사카모토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 page 46
사카모토의 업무를 인계받은 이기.
직장동료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경찰은 사카모토의 사망원인을 알려주는데...
"사카모토 씨의 검시 결과가 나왔거든요. 벌 알레르기였던 모양입니다."
...
"아마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 벌이 덮쳤나 봅니다. 몇 마리나 됐던 것 같아요. 그 외에도 몇 군데 쏘인 자국이 있었습니다. 딱하게도 말이죠." - page 102 ~ 103
벌.
빚.
남자...
확실히 사고가 아니라고 하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
타살. 살인. 그것도 계획적인...
하지만 왜?
의문을 품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 이기는 상상도 하지 못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
은행과 기업이 얽힌 음모
은행 안의 복잡한 파벌 싸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의도 불사하는 비열한 상사
상상 이상으로 잔혹한 범죄자와의 만남 등
치밀하면서도 스피디하게 사건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한자와 나오키』가 떠올랐습니다.
아무래도 '은행'이라는 점에서 그랬을 수도 있고...
저에겐 이케이도 준 작가와의 첫만남이 『한자와 나오키』였는데 그때 너무 인상적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다고 할까...
사망 사인이 뜬금없었달까,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임팩트가 좀 약했다고 할까...
초기작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럼에도 이 소설의 묘미는 흡입력을 뽑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 이케이도 준이 일본 대형 은행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실감 났었고 빠른 전개가 독자들이 한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끔 만들었었습니다.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이기.
"너 그런 짓하다가는 언젠가 은행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그럴지도 모르죠."
"회사는 너 같은 놈이 제일 다루기 힘들어. 출세에 혈안이 된 놈들이랑은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안온하게 월급쟁이 생활을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조직에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앉는다는 비애도 없고. 요컨대 너한테는 지킬 게 없어. 그러니까 조직 입장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로 보이지. 목적이 뭐야?"
"이번 경우는 지키기 위해서네요."
"지켜? 출세를?"
"설마요. 더 중요한 겁니다." - page 187 ~ 188
은행원으로서의 후각... 서글픈 습성...
그래서 더 지키고자 했던...
형태도 없고 개념도 없는 것. 있는 것은 단지 추한 사념뿐이다. 그야말로 암거다. 영혼의 심연, 끝없이 깊은 암담함. 그것은 단지 가치관 같은 척도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하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으며 계기조차 알 수 없는 광기. 이 이상 이놈을 살려둘 수는 없다. 사카모토를 위해. 사에를 위해. 요코를 위해. 나오를 위해. 야나기바를 위해. 후루카와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 page 312
하지만 너무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
"틀렸어, ○○○○. 우리 은행원들이 과거에 눈을 돌리는 건 거기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야. 너한테 만일 미래를 만들 능력이 있다면 이 현실은 뭔데? 이 상황을 만든 건 과거의 네 자신이잖아. 망상이야, ○○○○. 너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뿐이라고. 네가 가지고 있는 건 미래를 창조하는 비전이 아니야.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아." - page 368
출세와 성공을 위한 인간의 욕망의 바닥끝 칼날이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된 사실.
익히 잘 알기에 더없이 씁쓸함이 남았던 이야기...
이케이도 준 작가로서의 시작을 장식했던 이 소설.
지금의 행보도 함께했지만 앞으로도 또 그만이 그려낼 수 있는 '정의'를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