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칸타타
김병종.최재천 지음 / 너와숲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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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와 과학자의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는데 이들이 '생명'을 주제로 대담을 한다는 점에서 기대가 되었었습니다.

두 저자의 시선 끝에 나의 시선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들의 동행에 저도 동참해 봅니다.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생명 칸타타



생명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바보 예수>와 <생명의 노래> 연작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을 화두로 작품 세계를 펼쳐온 한국화가 '김병종'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살라'는 '명령'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숨 쉬는 일이고 움직이는 일이다. 그림도 살아 있는 생물이다.

내 그림은 모두 숨 쉬고 움직이며 이동한다. 멈춰 선 순간처럼 보이는 그 속에도 정중동의 미묘한 움직임이 있다. 노래는 그 움직임들이 서로 만나고 흐트러지면서 순간순간 만들어내는 가락이다. 따라서 내 그림 속에 진정한 의미의 스틸 라이프는 없다. - page 13

젊은 나이에 입원 생활을 하면서 줄레줄레 주사 줄이 꽂혀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비로소 생명의 울림, 소중함이 사무치게 다가왔다는 그.

그래서 작은 것들, 어렸을 때 만난 생명의 호흡들을-바람의 향기, 햇빛, 구름의 이동, 분분히 날리던 송홧가루 같은- 그리게 되었다는 그.

그의 그림을 보면 생명의 아름다움을, 같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저에게는 <몽환의 구름, 송화분분>으로부터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송화 꽃에도 암수가 있어서 먼저 꽃을 피워 모체를 떠나는 것이 수꽃이라 합니다.

수꽃들의 발화가 가장 왕성하게 일어날 때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그 노란색 생명체의 여행을 도와준다는데...

안타까운 것은 아주 적은 수의 꽃들만이 암수 결합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대부분은 낙화하고 만다는 사실. 방하착. 이상적 만남으로 생명 유전자가 무사히 싹을 틔우면 낙락장송도 나올 수 있지만, 대부분 화롯불에 떨어지는 눈꽃 한 송이처럼 그렇게 소멸해간다. 그토록 소멸해갈 것이라면 저 노란 점들은 왜 저토록이나 아름답고 몽환적으로 태어나 떠나가는 것일까. 아름답지만 슬프다. 몽환의 구름처럼 떠가던 그 송화분분. - page 37

어디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그 몽환적 노란색의 이동.

이토록 쓸쓸하고도 찬란한 송홧가루를 그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에 대해 동물과 곤충들의 행동 연구를 통해 인간의 삶, 나아가 생명의 과학적 진리를 찾아 나서고 과학의 대중화를 주창해 온 최재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에 관해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한번 정리해 보려고 해요. 할 수 있다면 종교에서 바라보는 생명의 의미, 예술가들이 그려내는 생명의 모습 등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생명을 죄다 다뤄보고 싶어요. 이런 생각을 왜 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하긴 했는데 어느 날 생명의 가장 보편적 속성이 뭘까 하는 생각을 스치듯 하다가 아, 죽음이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적어도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은 언젠가 끝이 나잖아요. 모든 생명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 바로 죽음이에요. 그 생각을 하고 나니까 '아, 이거 한번 제대로 정리해봐야겠다' 싶었어요. - page 123 ~ 124

죽음을 전제로 한 생명.

그럼에도 영속성이 있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연속성도 있는 '생명'의 고귀함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늘 사고하며 살아가는 유일한 동물도 아니고, 가장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의 영장이라는 책임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인간이 참으로 특별난 종임에는 틀림없으나, 인간도 엄연히 이 자연계의 한 구성원이며 진화의 역사를 가진 한 종의 동물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틀림없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글의 제목을 '자연 앞에 겸허한 자세로'라고 붙였었다. 그러다가 글을 써 나가던 도중에 '자연 속에 겸허한 자세로'라고 바꿨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감히 자연 앞에 건방지게 설 수 있겠는가? 그 말 또한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켜놓고 보는 이원론이 아닌가? "드디어 적을 찾았다. 그런데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라는 표현처럼 겸허한 자세로 자연 속에 다시 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page 214

생명의 끝은 죽음, 죽음의 시작은 생명.

이 슬픈 알고리즘 속에서 이들이 전한 메시지.

한번은 짚고 넘어갈 우리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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