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바로 운동화를 꿰어 신고 나가 달리던 철이.
그런데 그날은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석 옆에 떨어져 죽은 새 한 마리를 보게 됩니다.
아직 어린 잿빛 직박구리.
"잘 묻어줬니?"
"다 보셨잖아요."
"어떻게 묻어줄 생각을 다 했어?"
"몰라요.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어디가 아팠을까요? 아니면 혹시 물을 못 먹어서 죽은 걸까요?" - page 16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휴먼매터스의 공학박사인 철이 아빠 최진수 박사와 데가르트, 칸트 그리고 갈릴레오라는 이름을 지닌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더없이 쾌적한 환경에서 살던 철이.
어느 날 검은 제복을 입은 이들로부터
"보십시오. 인간은 이렇게 H라고 뜹니다. 인간에게서만 방출되는 방사성원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한테서는 그게 나오질 않습니다." - page 37
무등록 휴머노이드라며 그를 수용소로 끌고 갑니다.
이제껏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철이는 그곳에서 선이와 민이를 만나면서 휴머노이드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 역시도 휴머노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는 '나는 누구인가'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전으로 불안전했던 세상은 민병대가 수용소를 부수고 로봇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틈을 타 철이와 민이, 선이는 탈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부의 레이더망에 걸렸고 민이를 잃게 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온몸을 압도하던 공포가 물러가고, 이제 슬픔이 마치 따뜻한 물처럼 그녀의 마음에 차오르는 느낌이었고, 그 슬픔이 오직 선이만의 것은 아니라는 듯, 함께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이 단순한 행위를 통해 그녀가 느끼고 있을 유독한 슬픔이 아주 소량이나마 내게로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이 사라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와 나, 그런 뚜렷한 경계가 사라지고 공통의 슬픔이라는 압도적 촉매를 통해 선이와 내가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괜찮아. 다 끝났어. 이제 다 끝났어. 민이는 이제 편안히 쉬게 될 거야." - page 127 ~ 128
철이와 선이는 호수에 다다르게 되었고 거기서 재생 휴머노이드 '달마'를 만나게 됩니다.
달마에게 민이를 되살려달라고 하지만 달마의 답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성이니까요. 그들은 오랜 세월 사람은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윤리를 확립해왔고, 그래서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데도 살려두려고 합니다. 환자의 생각은 무시한 채 말입니다. 생명은 그 어떤 경우에도 소중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그걸 금과옥조처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온 것은 또 아닙니다. 인류가 벌인 그 수많은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문제이고 우리는 지금 한 휴머노이드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묻는 것은 이 휴머노이드를 재활성화, 아니 여러분의 표현대로 살리는 것이 정말 이 휴머노이드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여러분이 확신하느냐는 것입니다." - page 147 ~148
이에 대해
"제 생각은 달라요. 이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 정말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 page 151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나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그렇기에 민이를 살려야 한다는 선이의 말.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튼 민이를 살리고자 했지만 결국은 그리하지 못하게 되고 철이는 최박사와 재회를 하게 되는데...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철이에게 어떤 삶이 펼쳐질지...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인이 있었다. 지금 그 두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의식까지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떠오르기 시작한다. 한때 회상은 나의 일상이었다. 순수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던 시절, 나는 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기억을 이어 붙이며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 모든 것이 흔들리던 순간에서 시작됐다. - page 9
단순히 소설이라 치부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존재의 의미에 대해 많은 여지를 남겨주었던 이 소설.
"당신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고자 합니까?" - page 228
책을 덮고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이 문장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 page 204
작별인사의 의미가 뭉클하게 다가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