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초재(고향 논산에 있는 집필실), 문학, 사랑, 세상을 테마로 총 4부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무던히 써 내려간 그 이야기들은 고요 속에서 찬란히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읽으면서 어느새 저도 그 불빛을 쫓고 있었습니다.
생은 멀고, 또한 찰나적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봄꽃의 낙화를 보라. 길고 혹독한 겨울 동안의 인내를 생각하면 봄꽃들의 황홀한 개화는 찰나에 불과하다. 곧 지고 만다. 그러니 봄꽃의 낙화는 얼마나 속절없고 애달픈가. 어디 봄꽃만 그렇겠는가. 청춘의 광채도 그러하고 사랑의 열락도 그러하다. - page 74
어느새 이 말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는 게...
낙화도 그렇듯 우리의 인생의 과정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낙화로부터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픈 이야기.
지금 지는 꽃이 작년의 그 꽃이 아니며, 지금 나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강물이 어제의 그 강물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꽃이 지는 게 죽음이 아니라, 변혁 없이 머물러 있으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좋다는, 시간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른 속임수에 넘어가고 싶지 않다. - page 77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함을.
잘 아는 이야기 같지만 또다시 주억거리게 되었습니다.
<'당신'이라는 말>이야기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 읽은 소설이라고는 《당신-꽃잎보다 붉던》이었었는데...
그 소설에서 저 역시도 인상적인 구절이었던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라는 낱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디어 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너무나도 아련한 그 단어, 당신.
이 책에서도 그가 전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최종적으로 이기지 못할 건 시간과 허공, 두 가지밖에 없다. 연애의 본질인 '정염'은 너무나 찰나적이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월의 더께가 입혀진 '당신'이란 말은 시간을 넘어선 부동심과 만나면서 마침내 불멸의 한 끝에 닿는다. 너와 나로 요약되는 젊은 날의 '연애'는 끝내 상실의 슬픈 종말과 만나지만, 오랜 세월 함께 견디면서 나아가다가 얻는 '당신'으로서의 관계는 시간의 제한을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의 제한을 넘어서면 그것이야말로 곧 불멸의 사랑이지 않겠는가. - page 162
그 어떤 사랑 표현보다 더 멋진 말인 듯하였습니다.
당신...
나는 무엇을 찾아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좌초해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프게 가슴을 후비는 햇빛 밝은 날이에요. 젊을 땐 그랬었지요. 환갑을 넘기고 나면 최소한 내가 왜 세상으로 왔는지, 나는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 사는 일이 늘 환한 아침 들길 걷는 것 같으리라 상상했어요. 그러나 여전히 나는 여기, 생의 비의에 따른 어떤 불가사의한 프로그램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지금 느껴요. 그럼요, 아직도 나는 내가 왜 이 세상에 와 있는지 모르지만, 살아 앉아 길을 묻고 있으니 존재의 빛이 아주 꺼진 게 아니라고 여겨요.
세상이 비춰주는 서치라이트가 아니라, 내 안에 간직된 이 빛이야말로 나의 참된 등불이겠지요. 세상의 서치라이트보다 내 안에 간직된 이것, 희미하고 푸른 불빛에 의지해 걸어가는 게 남은 생의 지혜라 생각해요. 푸르스름한 존재의 비밀스런 불빛 속에서 보면 아, 살아있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한지요. - page 144 ~ 145
오늘도 내 안에 간직된 그 빛을 따라 나만의 걸음 속도로 걸어가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