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 그 높고 깊고 아득한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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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0주년을 맞아 2종의 산문집을 발표한 '박범신' 작가.

정말 오랜만에 작품을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2종의 산문집 중에서도 먼저 이 책이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이야기하는 바람'

박범신의 높고 깊은 산문미학!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의 순례길을 따라가보려 합니다.

"나는 본래 길이었으며 바람이었다"

삶의 비의와 신의 음성을 찾아가는 머나먼 길

지극한 정신과 육체로 몰아붙인 순수의 여정

순례



아마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

질주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기에 너나없이 오로지 앞으로 달려가는 우리들.

그렇게 한참을 앞만 보고 내달리다가, 어떤 새벽이나 한낮, 또는 어떤 저녁 어스름에 순간적으로 가슴 한쪽을 면도날로 긋고 가는 듯한 예리한 동통을 느끼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이런 순간을 그는 여기, 히말라야에 온다고 하였습니다.

히말라야는 무엇보다 내가 내 집, 내가 속한 사회에서 악을 써가며 지키고자 했던 것, 사악한 전투, 거짓말, 허세,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주었던 상처들까지, 얼마나 나와 상관없이 주입된 가짜 꿈들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걷는 것뿐입니다.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습니다. 오직 내 앞에 놓인 길만이 나를 도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분산되지 않습니다. 멀리 있으니 오히려 내 나라가 조감도처럼 한눈에 보이고 그곳에서 습관에 의지해 죽을 둥 살 둥 달려온 나의 지난 삶도 아프게 보입니다. 바로 '은혜로운 생음'이 불러온 본원적 세계를 사실적으로 보고 느끼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 page 17

그렇게 히말라야로, 킬리만자로로, 피레네산맥으로 자신 앞에 놓인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몸은 고될지언정 불안감엔 사로잡히지 않는 그 길 위에 순례자가 되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나는 비로소 눈물겹게 확인합니다. 불멸의 주인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오르고 또 올라도 허공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모든 길은 허공에서 시작되고 갈라지고 끝난다는 것을요. 살아서 무엇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근원적으로 우리가 불멸의 환희에 도달할 수 없는 건 스스로 허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 page 79

나는 무엇을 찾아 헤매었던가.

끊임없이 그가 묻고 또 물었던 이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와 묻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히말라야 산협을 걸으면서 가장 아프게 다가온 회한은 고백하건대 대개 사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남녀 간의 '연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으로서의 에너지가 사랑이라면 너무 보편적일까요. 범박하다고 질책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서 불멸은 꿈일진대, 사랑 이외에 우리가 진정을 다해 말해야 할 것이, 사랑 이외에 우리가 목 놓아 울어야 할 것이, 사랑 이외에 우리가 모든 진심을 맡겨도 좋은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날이 많았습니다.

그렇고말고요, K형. 돌이켜보니 나는 사람이었고, 사람이므로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사랑은 나의 명줄이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썼고, 사랑 때문에 세상과 더러 싸웠고, 사랑 때문에 노동과 모든 수고를 바쳤으며, 사랑 때문에 자주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러나 히말라야를 걸으며 나는 아프게 자책했습니다. 나의 사랑은 사랑이었다기보다 사랑의 습관, 사랑의 습관이라기보다 사랑의 '모방'은 혹시 아니었을까 하고요. - page 116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폐렴을 얻고 돌아와 폐암 판정을 받은 그.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암종이 나의 숨구멍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는 전갈을 듣고 나는 순간적으로 이제까지 걸었던 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순례가 시작되겠구나하고 생각한 것 같아요. 마침내 하나의 먼 길이 끝나고 또 다른 하나의 먼 길이 시작되는 문 앞에 당도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내가 이 책의 말미에 이 글을 덧붙이는 건 그 때문이에요. 마음 아프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죽든 살든, 어차피 한 세상 사는 건 당연히 하나의 순례니까요. - page 292

인생도 하나의 순례라 외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순례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숙연해졌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내 앞에 놓은 길.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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