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나는 신문을 읽다가 흥미로운 광고를 보았다. '이 책을 쓴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신문 전면에 소설의 한 부분이 실려 있었다. 언뜻 뻔한 광고 같았지만, 첫 문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읽어나가던 나는 잠시 후 그것이 내가 쓴 소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page 7
칠 년 동안이나 소설을 쓰지 못한 소설가 '나'.
어느 날 신문을 읽다 자신이 데뷔하기 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문예공모에 제출했던 작품인, 공모전에 낙선한 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소설 일부가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더이상 광고를 싣지 말라고 신문사에 연락하였는데 뜻밖의 인물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이름은 진, 선우진이라는 여자.
"이게......"
"선생님의 책을 이름만 바꿔 새로 찍은 거예요."
검은 배경에 하얀 나선이 새겨진 표지는 그대로였다. 다만 그 위에는 '이유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편은 이 책을 쓴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했어요. 어딜 가든지 이 책을 들고 다녔죠."
진은 책 안에 꽂혀 있는 사진을 꺼내들었다.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 - page 13
육 개월 전 실종된 남편을 찾고 있다는 진은 그녀의 남편이 광고 속의 소설을 쓴 작가로 행세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본명은 이유미, 서른여섯 살의 여자예요. 내게 알려준 이름은 이유상이었고, 그전에는 이안나였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여자라는 사실까지 속였으니 이름이나 나이 따위야 우습게 지어낼 수 있었겠죠. 그는 평생 수십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았어요. 내게 이 책가 일기장을 남기고 육 개월 전에 사라져버렸죠." - page 14
비밀이 많은 이유미라는 인물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런데 지난주에 당신을 만나고 나서, 일주일 내내 마치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궁금한 것이 점점 더 늘어나는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의 반복된 거짓과 위증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그 시작과 끝을 알고 싶어요. 단순한 흥미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 저는 이것이 일종의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수께끼라고요?"
진은 명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지금 그이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인가요?"
"네. 가능하다면요." - page 30
그렇게 '이유미'와 스쳐갔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발자취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점점 다가갈수록 마주하게 된 진실의 민낯.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름, 학력, 직업, 성별...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한 사람.
왜 거짓 속에 자신을 감춰야만 했던 것일까...
우리는 좀더 노력해볼 수도 있었다. 시간을 흩어진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볼 수도 있었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인생의 과정이었다고 추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 모든 삶의 가능성을 단번에 잘라내고, 차라리 민둥산처럼 헐벗는 쪽을 택했다. 삶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것 말고는 처음으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다시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age 240
생에 대한 증오로 거짓과 기만의 구멍 난 삶을 살아간 그녀.
그 삶이 정당하지는 않지만 그 심정만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미래와 꿈에 대해, 그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죠. 한 번도 나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사기든, 모략이든 술수든, 그걸 무슨 말로 부르든 간에, 어쨌든 저는 그로 인해 삶을 처음부터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먹고, 마시고, 손을 잡고 잠드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지요. - page 247
소설을 읽으면서 한 문장이 유독 뇌리에 남았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환상을 좇는 것이다. - page 52
헛된 꿈, 허무맹랑한 욕망에 이끌려 좇지만 결국 그 끝은 말처럼 헛되고도 허무맹랑함을...
이 달콤하고도 쓰린 삶을 살아온 이유미를 보며 안쓰럽다고 해야 할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녀......
아마 이유미뿐만 아니라 '나', 우리 모두도 가면 뒤에서 살아가지 않나? 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거짓'이라 치부할 수 없음에...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