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독일의 사형 집행인들은 자비에 가까운 방법으로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한다. 거열형 순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형이 집행되기 직전 목을 졸라 미리 죽이기도 했고, 화형을 선고받은 자들이 최대한 빠르게 질식할 수 있도록 장작더미에 황을 넣어두기도 했다. 사형수들에게 짧은 고통과 편안한 죽음을 주기 위한 나름의 고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들의 가상한 노력에도, 어쨌든 세상은 그들을 살인자로 기억할 것이다. 여전히 그들을 괴물이라 손가락질하고, 죽음을 가지고 오는 불길한 존재라고 멸시할 것이다. 사형 집행인들 역시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그런 가상한 노력을 했던 것은 물론 아닐 것이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그 역시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자비의 사신'이 된 것은 아니었다. - page 13 ~ 14
자비의 사신이 된 '이수현'.
이 더럽고 끔찍한 일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우주였던 누나가 한 인간의 잔악한 욕망에 짓밟혀 죽었었습니다.
누나의 복수를 위해 첫 살인을 감행했고 그때부터 '괴물'이 되어버린 그.
수현 역시 그 희열을 알아버려 괴물이 된 것이다. 그런 자들은 돌아갈 수가 없다. 아니, 돌아갈 곳이 없다. 그 순간의 희열은 수현 속에 잠재되어 있던 괴물을 깨워냈다. 그 괴물은 이제 수현의 자아를 먹어치우려고 하고 있다. "내가 괴물이 되었나, 아니면 괴물이 내가 되었나?"의 구분은 더 이상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의미도 없다. - page 117
그런 그가 만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항암 치료를 하면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지만 치료를 거부합니다.
수현의 항암 치료 거부가 마음에 걸렸던 박사가 후배 정신과 의사를 불러 상담하게 하였고 그 의사가 건넨 명함 하나.
"우울증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미술치료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 page 25
그렇게 해서 찾아가게 된 곳이 바로 '하늘공방'이라는 미술 치료실을 열어 운영하는 '강희주'.
처음엔 서로 조심스럽게 미술치료를 했었지만 조금씩 수현의 마음도 열리고 희주는 수현의 상황을 알게 되면서 이 말을 건네게 되는데...
"전 이수현 씨가...... 살았으면 좋겠는데요." - page 127
살면서 처음으로 들어본 말....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수현 역시도 가까스로 참았던 울부짖음을 합니다.
"나를...... 나를 자꾸 살고 싶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그러는 당신도......" - page 245
사실 이 둘은 만나서는 안 될 인연이었습니다.
자신의 엄마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 죽여달라는 희주, 그 희주의 복수 상대가 바로 수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이 둘은 만나게 되었고 조금씩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될수록 잔인한 운명 앞에 절망하게 되는데...
폭풍처럼 몰아치는 이 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수현과 희주는 '고독'이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독은 서서히 다가오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느릿느릿 해가 점점 더 짧아지고 계절이 바뀌듯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의 주위에 맴돌고 있는 것처럼 고독을 낭만적으로 표현하지만 그건 고독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것이다. 고독은 폭풍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미미하기만 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막아볼 수도 없는 자연재해같이...... - page 230
고통스럽게 닥쳐왔던 '고독'.
이로 인해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남자가 있었고 괴물이 '되고자 하는' 여자가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울컥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에서 차오르곤 하였는데...
다음권에서 부디 상처 속 고독이 치유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