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뉴욕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이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리히텐슈타인.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짧게 공부한 후, 오하이오에서 실습과정을 밟고 미술 학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특히 교수 중에 호이트 L. 셔먼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어두운 방에서 스크린에 순간적으로 이미지를 비추는 '플래시 룸'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그리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강한 잔상, 총체적 인상을 어둠 속에서 그려야 했다. 부분이 전체와 관계를 맺는 지점이 어딘지를 알아채는 것이 요점이었다. [...] 그것은 과학과 미학이 뒤섞인 작업이었고, 바로 내 관심의 초점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 예술과 비예술을 규정하는지 늘 궁금했다. 셔먼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으로 통하는 길을 가르쳐주다. 그 자신은 이를 '지각의 통일'이라 불렀다." - page 10
시각이란 서술적이거나 감상적인 경험이라기보다는 광학적 과정이라며 가능한 한 의미를 비우고 볼 수 있는 지각력을 키워야 하고, 작품에 항상 예술가의 의도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셔먼의 생각이 리히텐슈타인에게 가장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대상 지향과 피할 수 없는 미술가의 의도 지향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중시했던 리히텐슈타인.
이런 긴장감이 자기가 그린 이미지의 주된 힘일 뿐 아니라 이미지를 익살스럽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뒤늦게 추상표현주의를 따라가던 1957년경, 추상표현주의는 새로운 조류의 배경으로 물러나고 있었고 리히텐슈타인은 미술시장의 주류와 관계를 맺으려 애쓰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58년 럿거스에서 캐프로의 작품을 알게 되고 해프닝에 몇 번 참여하면서
해프닝은 재미있고 많은 것을 시사하는 연극적인 이벤트이며 자신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가운데 하나
라 말하며 이때부터 도발적인 만화 그림이 등장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리히텐슈타인은 이전의 미술 감상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중요시되지도 않았던 전화번호부에 실린 작은 광고 드로잉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작품이 아무리 비개성적으로 보인다 해도, 그리는 과정 자체에 사람의 손길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내재해 있음에 그는 고급예술에 익숙한 대중에게 가장 저급한 것, 가장 예술성을 박탈당한 예술을 제시함으로써 논점을 던졌습니다.
"나는 어떤 것은 예술이고 어떤 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구분 짓는 기준을 늘 알고 싶었다" - page 25
그래서 그는 일간지에 실린 휴양지 포노코스의 신혼여행 호텔 광고로부터 <공을 든 소녀>의 아이디어를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