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운을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해왔을까?
책은 운의 역사로 되짚어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서 운이 하는 역할에 대해 주로 세 가지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순종, 반항, 그리고 부정.
운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포르투나를 달래거나, 불운을 남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행운을 차지하려 애썼습니다.
흔히 운은 대체 가능한 것, 이용하거나 다시 채울 수 있는 신비로운 자연력으로 여겼습니다.
한편 스토아학파는 외부 세계가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함으로써 포르투나의 위력을 무시하려 했습니다.
이들은 변덕스러운 우연에 당하지 않으려면 정념을 완전히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두려움, 괴로움, 질투, 분노뿐만 아니라 희망과 사랑, 즐거움까지도, 명예나 부를 포기하는 건 물론이고 자녀나 친구, 정치적 권리와 특혜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야 했습니다.
운을 부정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은 운과 우연, 예측 불허의 변화가 우리 삶을 좌지우지한다기보다는 운명의 신들이 우리의 운명을 정하고 필연이 그 운명을 고정해놓는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대인들이 믿은 운명의 여신, 중세의 제비뽑기, 갈릴레오의 도박 연구, 운의 정복자를 자처한 18세기 수학자들의 기록 등 우리 삶에서 운과 운명, 선택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밑바탕이 되어 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반례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카드 게임이나 주사위 던지기에서만 운이 중요한 건 아니다. 인생의 실패에 우리 자신의 책임이 얼마나 되는지 이해하고 우리가 포르투나의 피해자인지, 아니면 순전히 우리가 잘못한 탓인지 파악하는 데에도 운은 꼭 필요한 요소이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운이 좋았다고 기꺼이 인정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운은 자수성가한 사람들 앞에서 들먹일 만한 말이 아니다'라는 E.B. 화이트의 말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다. 운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이론이라면, 적어도 운과 실력의 기여도를 구분하여 각각의 비율을 측정하는 데 도움이 도리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낙관적인 가정을 하더라도 그것은 스포츠나 게임처럼 인위적인 제약이 가해지는 영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숫자만 봐서는 누군가를 칭찬해야 할지 비난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 page 96 ~ 97
우리는 살아가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겪게 됩니다.
선한 의지로 최선을 다해 도덕적 인생을 산다 해도 머피의 법칙 때문에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도덕적 책임을 묻고 평가를 내릴 때면 느닷없이 불운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운의 문제로 귀착하곤 합니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건 우리의 탓일까, 아니면 불운 때문일까?
성공한다면, 행운이 아닌 실력이 기여한 바는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해 어쩌면 '운'이란 그저 이야기를 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운은 객관적인 속성이 아니며, 면밀히 분석해보면 우리가 주변 상황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 주관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행운아 또는 불운아로 볼 뿐이다. 우리의 행동이나 야망과 큰 상관없이 다행스럽거나 불행한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운은 순전히 우리의 뜻대로 구축된다. 세계관을 쉽게 바꿀 수 있다거나, 의지만 있으면 비관주의자도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운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 page 312
결국 운은 인지적 착각이며 우리의 운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운'이라는 잣대로 나에게 벌어지는 일들과 상황을 이해하려 했던 스스로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행운이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래도 이젠 '운'에 기대기보단 스스로를 믿어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