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소설 『무진기행』 을 읽었을 때 큰 감흥도 없었고 어떤 내용이었는지 그저 희뿌연 안개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왜 『무진기행』 이란 작품이 문학적으로 의미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개로 뒤덮인 무진.
현실과 일탈 사이에서 번뇌하는 윤기준.
쓸쓸함이 아련히 남은...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앙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 page 23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육이오 사변을 당해 천리 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이 무진이었던 윤기준,
그리고 지금 제약회사 상무로 일하다가 당분간 도피하게 되어 찾아오게 된 무진.
별로 탐탁하진 않지만 도피할 때면 찾아오곤 하는 무진에서 음대 출신의 음악선생 하인숙을 만나면서 일탈을 꿈꾸게 됩니다.
웃음 띤 얼굴로 인숙을 돌아보는 윤.
색안경을 벗어 빽 속에 넣으며 놀란 얼굴로 윤을 보고 있는 인숙. 눈과 볼에 눈물을 흘린 자국이 있다.
윤, 한 팔로 인숙의 등 뒤를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 어찌된 영문인지 알고 싶어하는 인숙의 눈물 자국 있는 볼을 쥐고 왼뺨에 자기 뺨을 대며
윤 (속삭이듯 나직이) 우린 헤어지지 않는다. - page 149
하지만...
이 둘의 끝은 안갯속 무진에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인숙이, 나는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인숙이, 당신이 들려 주던 그 말을 떠나면서 나는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돌려 드립니다. 자기 자신이 싫어질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을 때, 인숙이, 그때마다 항상 안개 속에서 버둥거리던 한 사나이를 생각해 주십시오.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그 한 사나이를 생각해 주십시오... - page 166
뿌연 안개 속 무진의 모습.
도피처였던, 그래서 일탈을 꿈꿀 수 있었던 이곳에서의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나니 쓸쓸함과 허무함이 안개처럼 자욱이 제 가슴에 남곤 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헤어질 결심> 에서 주인공들의 대사가 더 와닿았습니다.
해준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서래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 영화 < 헤어질 결심> 중
그리곤 정훈희의 <안개> 노래가 아련히 들려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