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이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쿠바에서 보낸 크리스마스에 작은 기적을 만난 방송작가 '은하', 사랑에 대해 함께 이야기한 밤들이 모두 특별했음을 깨닫는 영화학도 '한가을', 아홉살의 크리스마스에 처음 만난 남자애와 스무살까지 이어온 인연을 떠올리는 '진희', 오랜 세월 함께한 반려견을 잃고 그 상실을 치유하고자 오래된 인연들을 다시 찾은 '세미', 맛집 사진만 보고 상호를 맞힌다는 인플루언서 '현우'와 그를 촬영하는 방송국의 피디 '지민' 등.
저마다 그려낸 일상에는 크게 특별할 것이 없는데 그래서 더 의미 깊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눈이 내리지만 눈의 결정이 똑같은 모양 하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눈송이들은 우리에게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우리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아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노래가 떠올랐고 잠시 차 한 잔의 여운을 즐겼습니다.
이무진의 <눈이 오잖아>.
눈이 오지만
우린 이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게 맞지만
그래도
지금
그 눈이 오잖아
-이무진 <눈이 오잖아> 중
일곱 편 중에 저에겐 아무래도 첫문을 열었던 <은하의 밤>이었습니다.
암 수술 뒤 다시 일에 복귀하는 과정을 그가 다시 찾은 인생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는데...
인생 역전이라니, 그렇게 인생이 쉽게 바뀌다니 너무 환상 같은 얘기가 아닌가. 은하가 생각하기에 인생의 극적인 변화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건 나의 의식과 상관없이 스멀스멀 조용하게 은밀하게 불가피하게 찾아들었다, 이를테면 암세포처럼. - page 17
'고모 아까 번화 잘못 걸었어요?'
은하는 나중에 답해야지 생각했다가 날이 지나면 더이상 크리스마스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을 바꿨다.
'아니'
메시지를 보내고 침대로 와서 눈을 감았는데 겨레에게 바로 답이 왔다. 한시인데 아직도 안 자나, 잠이 깬 건가 싶어 은하는 다시 일어나 휴대전화를 들었다. 거기에는 'ㅋㅋㅋㅋ다행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은하는 그 다행이라는 말을 몇번 더 읽었다. 그리고 연이어 '고모 이제 안 아파요? 다 나았어요?' 하는 메시지가 왔을 때 은하는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대화창을 물끄러미 보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정말 어떠한지를 곰곰이 따져보는 이 밤은 어떤 용서도 구원도 '수거'도 필요하지 않은 그저 흔한 은하의 크리스마스였다. - page 64
그랬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타일처럼 이어 붙어졌을 때 비로소 치유가, 위로가,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묵직하고도 따스했던 이야기들.
유난히 아픔과 슬픔이 있던 올 한 해를 이 소설들로부터 위로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깊어가는 겨울밤.
포근한 눈송이처럼 다정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