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것부터 먹고
하라다 히카 지음, 최고은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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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는, 그럼에도 술에는 진심인 저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낮술 시리즈'의 작가 '하라다 히카'.

그녀가 이번엔 숨겨진 미식 미스터리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그녀의 작품을 통해 일상의 공감과 위로를 얻었었기에 이번 역시도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과를 든 마녀가

우리 사무실로 들어왔다!

위기의 스타트업 회사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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츤데레 가사 도우미

맛있고 훈훈한 케미스트리

우선 이것부터 먹고



대학교 동창 다섯이서 의료 스타트업 회사 '그랜마'를 창업하게 됩니다.

회사를 설립하고 회의가 끝나면 술을 마시러 나가거나, 술과 안주를 사와 술자리를 갖는 등 멤버들이 모였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모든 멤버가 모인 적이 한 번도 없게 되었습니다.

다들 바빠서 밖에 있거나 마감이 가까워졌거나 "그런 이야기를 할 바에야 1분이라도 더 자고 싶다"며 눈을 붙이는 등.

그런데 일주일 전쯤 그랜마의 CEO 다나카가 살벌해진 회사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4명의 창립 멤버들에게 제안을 하게 됩니다.

"가사 도우미를 부르려고."

...

"매일 부를 건 아니고 일주일에 사흘,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4시간 동안 주방과 욕실 청소, 저녁과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거야." - page 19

그렇게 해서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게 됩니다.

광대뼈가 불거진 투박한 외모,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한, 여성스러운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 그녀의 외양.

"오늘부터 일하게 된 가사 도우미 가케이 미노리입니다." - page 11

무뚝뚝한 중년의 가사 도우미 가케이는 직원들의 거친 마음에 스며드는 요리를 뚝딱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사무실 직원들이 가장 먼저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가 되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과거와 함께 곧 또 다른 사건이 모두를 기다리는데...

사실 저에겐 그녀의 첫 등장부터 강렬했습니다.

창업 멤버 중 '홍일점'이었던 고유키.

그래서일까.

'여자'라는 자격지심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하필 가사 도우미와 눈이 마주쳐 하는 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케이 쪽으로 갔더니,

"무슨 일이시죠?"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퉁명스레 물었다.

"야식, 만들어 놨거든." - page 42

그러면서 테이블 위의 큰 대접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워서 먹고... 그리고-"

"... 그거, 저한테 하라는 건가요?"

"어?" - page 46

"우습게 보지 말라고요."

"미안. 그러려던 게 아니라, 아까 둘러보니까 아가씨한테서만 살기라고 할까... 각오라고 할까...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거든. 다른 사람들하고 달리. 하지만 그건 그냥 내 느낌이고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아니었다면 미안해."

각오...?

고유키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옆에 있던 의자에 힘없이 털썩 앉았다.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고? - page 48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한순간 터져 흐느끼게 된 고유키.

그런 고유키를 보고 가케이는 말없이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사과를 든 비쩍 마른 중년의 여자.

동화 속 마녀 그 자체였던 가케이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껍질을 벗긴 뒤 사과를 굽는 것이었습니다.

"여직원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디저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여자는 단 걸 좋아한다는 편견이나 차별이 무의식적으로 나온 건지도 모르겠네."

가케이는 혼잣말하듯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뿐이었어."

"감사합니다. 저도 너무 감정적으로 굴어서 죄송했어요."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사과한 건 오랜만이었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졌다.

"남자의 역할이나 여자의 입장 같은 건 너무 신경 쓰지 마."

가케이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건 이 일을 잘하고 좋아하기 때문이야." - page 54 ~ 55

줄곧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던 고유키.

그런데 새로운 사람이 몇 시간 와 줬다고 이렇게 가족처럼 밥을 먹고 있는 이 모습을 보게 되면서 고유키도 조금 마음을 놓게 됩니다.

자, 나도 일하러 가야지. 고유키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 page 59

그렇게 가케이는 구운 사과에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디저트부터 도미 머리 밥까지 위로가 필요할 때, 응원이 필요할 때, 논의 상대가 필요할 때 그랜마 직원들 곁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케이 씨의 음식 중 인상적이었던 영양 밥.

쌀에는 거의 색이 배지 않았다. 흰쌀밥에 가까운 밥에 잘게 다진 고명을 섞어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깊은 맛이 났다. 입에 넣으면 육수 향이 코를 지나 빠져나갔다. 쓱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진득하게 흔적을 남기고 빠져나갔다.

평소에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 다나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까 그녀가 말한 대로 적은 조미료만 가지고 이렇게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씹을 때마다 그 맛은 밥의 단맛과 어우러져 더욱 깊어졌다.

쌀과 육수는 왜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까. 마음과 몸에 서서히 온기가 돌았다. 그날 이후로 싸늘하게 식어 있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다나카는 생각했다.

"맛있다."

한숨처럼 감탄이 터져 나왔다. - page 343 ~ 344

심플하지만 복잡하면서 다정한 맛.

그 속에 담겨 있었던 조심스러운 속사정까지.

다 같이 둘러앉아 먹으며 어느새 한 식구가 되어갔고 이해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식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만큼이나 저도 위로를 받은 느낌이랄까.

마음 한 켠에서부터 따스함이 퍼져나가면서 끝내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가케이씨가 매 음식마다 외치던 이 한 마디.

"자, 우선 이것부터 먹어 봐."

그 어떤 말보다 다정했던 이 한 마디를 제 가슴속에도 새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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