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년에 '왜', 즉 일본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인 '임진왜란'.
1592년 4월에 일어나 1598년 11월까지 무려 7년 동안 이어진,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치는 최악의 상황까지 발생했던 아비규환 그 자체였던 전쟁.
하지만 이는 단순히 영토를 둘러싼 전쟁이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의 문화를 훔쳐 간 문화전쟁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사로잡아 놓은 조선 사람 가운데 세공 기술자와 바느질 잘하는 여인, 손재주가 있는 여인이 있으면 곁에 두어 여러 가지 일을 시키고 싶으니 보내주길 바란다. 부하들에게도 알려주기 바란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주인장(1593년 11월 29일)
수많은 기술 중에서도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가장 탐을 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각종 도자기만으로도 모자라 기술의 원천인 사기장과 원료인 고령토까지 몽땅 털어간 일본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일본을 '도자기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하지요.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해외에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 page 103
조선인 사기장들은 애통한 나날을 보내다 결국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마을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 사연을 듣고 한 스님이 880개의 묘비를 모두 모아 탑으로 쌓았다는데 이곳이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아주 작은 마을 오카와치야마 '비요의 마을'에 있는 도공무연탑이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기 전까지도 조선을 그리워했을 사기장들.
그들은 지금도 이름 없이 타국 땅에 묻혀 있음에 그들의 피와 눈물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치욕스러운 역사를 몇 번이나 다시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지난 실패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잃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비, 즉 잘못을 꾸짖어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임진왜란을 거치며 엇갈린 조선과 일본의 국력이 다시 뒤바뀌게 되는 역사적 장면을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 page 117
그리고 35년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을 수호하기 위해 흘렸던 피와 눈물, 그 고통스러운 진실과 안타까운 사연이 아려왔었습니다.
'우리나라글'을 뜻하는 '한나라 글'을 줄여서 '한글'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는데, 후에 '하나', '크다', '바르다'라는 의미가 더해졌다고 합니다.
사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해 우리 글자를 만들었지만 그때는 훈민정음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글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국어학자 '주시경'.
1907년 주시경은 국어강습소를 설립해 조선의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1908년 국어를 연구할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라는 학술단체도 만들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우리말을 '국어'라 할 수 없게 되자 '국어연구학회'는 순우리말을 이용해 '배달말글몯음'으로 바뀌었다가 1913년에 '한글모'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 우리글의 이름, '한글'이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게 참 놀랍죠? 이렇듯 한글이라는 이름은 일제의 식민 지배 시절, 국어를 국어라 부르지 못하고 국문을 국문이라 부르지 못하는 시대적 아픔 속에서 태어난 유산이기도 합니다. - page 246
그는 우리글에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우리말을 우리글로 풀어낸 사전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경솔국치 다음 해인 1911년, 주시경은 제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 '말모이' 편찬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그는 39살 젊은 나이로 돌연 사망하게 되고 그럼에도 제자들은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편찬을 계속하게 됩니다.
일제의 탄압과 검열, 모진 옥살이와 시련을 견뎌낸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원고는 광복 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고 마침내 약 18년 만에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으로 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