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위고 키가 크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든여섯 살의 '시노다 간지'.
대머리에 몸집이 작은 여든 살의 '시게모리 츠토무'.
축 늘어진 뺨이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데다 숏 보브 스타일의 백발이 남의 이목을 끄는 여든두 살의 '미야시타 치사코'.
12월 31일 세 사람은 바 라운지 부스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 마실 거리를 주문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 세 사람.
그래서 모두 추억담이라면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은 아직 길고 집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방은 하나밖에 잡지 않았지만 오늘 밤 세 사람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 page 14
1월 1일.
노인 셋은 엽총으로 자살하게 됩니다.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왜 세 사람은 섣달그믐날 밤에 함께 목숨을 끊었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줄 이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에 남아있는 자들에겐 혼란이 찾아들고 그렇게 소설은 죽음 앞에 선 세 노인들과 타인의 죽음 뒤에 선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뭔가 진하고 어쩐지 쓸쓸한 맛만이 남았던 이 소설.
세 사람의 대화를 엿보면
"저기, 벤짱은-"
치사코는 큰맘 먹고 입을 열었다. 어쩐지 간지 앞에서는 묻기 힘들었는데 지금 간지는 자리를 비운 참이다.
"간지 씨가 처음에 계획을 말했을 때 어째서 곧바로 '나도'라고 했어?"
...
"하지만, 돈 따위."
말을 이으려던 치사코를 츠토무는 가로막는다.
"촌스러운 말은 하지 않기. 선택할 수 있는 건 '언제'냐는 것일뿐, 그건 만인에게 공평하게 오는 거니까."
치사코는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하고 속으로 말한다. 나는 돈은 있지만, 돈이 있어도 갖고 싶은 게 없어져 버렸어.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곳엔 이제 하나도 없어. - page 152 ~ 153
더없이 쓸쓸하고 공허한 이 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조금이라도 해방감을 느꼈을까...
살아남은 자들-아들, 딸, 손녀, 손자, 옛 동료, 부하 직원, 제자 등-로부터 생전 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부재로부터 오는 가눌 수 없는 슬픔과 원망, 자책, 감사, 그 외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가운데도 자신의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이...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이 왜 이리도 가슴 사무치게 남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잠 못 드는 날이 이어져 과호흡 증세를 일으키거나 너무 울어서 토할 때도 있다 보니 남편이 억지로 데려갔다. 남편의 지인인 의사는 여러모로 잘해 주긴 하지만 그곳에서 처방받은 여러 약을 복용해도 여전히 눈물은 느닷없이 흘러넘친다. 곤란한건 언제 어느 때 눈물이 터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마당에 심은 구근 하나가 올해 처음 꽃을 피운 것을 발견했을 때라든지 슈퍼마켓에서 장을 다 보고 바깥에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을 때 혹은 우연히 탄 택시의 운전기사의 느낌이 좋지 않았을 때 갑자기 세상이 아버지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는 감각에 휩싸인다. 그 감각은 손에 닿을 듯이 생생하고 세상 그 자체와 맞먹을 만큼 거대해서 미도리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러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쉬기가 힘들어지면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 - page 142 ~ 143
하지만 애초에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미도리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쓸쓸했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비로소 용납되는 일이 있고 미도리는 그것을 아버지의 죽음으로 통감했다. - page 250
저 역시도 소설을 읽고 난 뒤 스스로에게 묻곤 하였습니다.
그 세 사람을 말릴 수 있었을까...?
아니 말리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일까...?
역시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뭐,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이란 게 있으니까요." - page 219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며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일러주고 싶었던 메시지였습니다.
너무나 깊은 여운이 남아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왠지 떨어지는 나뭇잎에, 불어오는 바람에도 눈물이 맺힐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