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에서 볼 듯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잠곡유고』에 실려 있는 김육이 쓴 시.
그 시에는 '노호', 곧 '늙은 여우'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당시 김육이 살던 곳 근처 어느 산골짜기 바위 밑에 사람 홀리는 여우가 산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환영으로 젊은이를 홀리는 여우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간단한 이야기로 끝날 수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밤거리에서 행인을 유혹하는 쾌락이나 범죄를 조심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의 욕망을 이용해 속임수를 쓰는 사기꾼이나 협잡꾼을 여우에 빗댄 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이야기는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솔직히 의문이 들곤 합니다.
왜 여우일까...?
우선 여우는 산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갯과 동물이다. 갯과 동물에는 늑대와 개를 비롯해 여우, 승냥이 등이 있는데, 그중 일부 종은 깊은 산속이 아니라 사람의 생활 영역 가까이에서 자주 목격된다. 특히 마을 주변의 야산에 주로 서식하는 여우는 민가에 내려가 음식을 훔쳐 먹고, 굴을 파 놓고 드나드는 등 사람 눈에 영리하고 교활한 행동으로 보일 법한 습성을 지닌 야생 동물이다. 구석기 시대에는 여우가 동굴 주변에서 사람의 주식이었던 순록의 찌꺼기를 먹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만큼, 여우가 인간 주변을 맴돌며 살아간 역사는 유래가 깊다. 갯과 동물 중에는 여우보다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사람의 생활 영역 안으로 들어와 가축으로 길들여진 종도 있는데, 바로 늑대의 친척인 개다. - page 64 ~ 65
여우 역시 개처럼 사람 곁을 기웃거리며 사람의 생활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짐승이기에 옛사람들의 시선엔 여우가 사람 흉내를 낸다거나 사람을 홀린다는 소문을 만들어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여우가 사람에게 쉽게 적응하는 특징 말고 '여우 울음소리'도 여우 전설이 탄생한 배경으로 중요하게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갯과 동물 가운데 몇몇 종은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개나 늑대가 내는 긴 울음소리는 잠깐씩 마치 사람이 울부짖는 듯한 음색처럼 들릴 때가 있다. 이 때문에 늑대의 긴 울음소리는 공포 영화의 효과음으로도 자주 사용된다. 개 짖는 울음소리는 상황과 품종에 따라 워낙 다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1,000 ~ 2,000Hz의 소리가 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런 소리는 사람의 말소리에서 흔히 들리는 음높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이 소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기 쉽다. 그렇다면 갯과 동물인 여우가 낸 기묘한 울음소리가 사람을 놀라게 하여 이상한 소문의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진 않을까. - page 66 ~ 67
사실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해 산속에서 누군가를 홀렸다는 이야기를 이리 진지하게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따져보고 난 뒤 지금의 우리의 토종 야생 여우가 멸종해 버렸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니 조금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여우에 대한 관심을, 단순히 지나치는 이야기로 그치지 않아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 만에 개최되는 '불꽃 축제'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날 전남 순창에서는 액운을 쫓고 복을 비는 목적으로 새벽에 첫닭이 울면 대나무에 불을 붙여 대나무 터지는 소리로 잡귀를 물리치는 '댓불피우기'가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기술이 발전해 화약이 개발되면서 불꽃 또는 화약의 폭발 그 자체가 악귀를 물리치는 효과가 있다 생각한 조선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되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무섭고 괴이한 것을 쫓기 위해 총이나 대포를 쏘는 '방포사'를 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총을 쏘아서 유령을 무찌를 수 있을까?
유령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조선 전기에 화약을 이용하는 성대한 불꽃놀이가 나라를 위협하는 자들을 제압하는 현실적인 효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399년(정종 1년) 6월 1일 자 기록에 조선의 불꽃놀이를 본 일본 사신의 반응이 남아 있다.
일본국 사신이 대궐 안으로 들어가니 술과 음식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일본국 사신이 놀라서 말하였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
이제는 귀신을 쫓는 조선의 총잡이들이 발붙이기 어려운 과학의 시대이지만 그들을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조선 궁중에서 유령을 쫓아내고자 총을 쏘는 방포사는 무속인이나 종교인이 아니라, 화약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인 화포장이 담당했다. 그런데 1984년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에서도 유령과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은 영매나 주술사, 초능력자가 아니라 양자역학과 전자공학을 응용해 기계를 개발하는 과학자다. 이렇게 놓고 보면 400년 전 조선의 유령 총잡이들의 모습은, 공교롭게도 <고스트버스터즈>의 유령 퇴치업자들과 무척 비슷해 보인다. - page 231
멋지지 않은가!
허구에서 과학적 사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나 흥미로웠습니다.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
특히나 우리의 옛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흥미롭고 다채로운 이야기가 가득한 줄 몰랐습니다.
과학과 고전문학의 만남.
저자는 우리에게 이 점을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작은 이야기를 과학을 활용하여 더 풍성하게 따져 보면서, 더 재미난 이야기로 상상해 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 자체로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도 없고 명확한 과학이라 할 수도 없는 내용이지만, 역사와 과학이 동시에 나타나기 마련인 옛문학에서 상상력을 통해 이야기가 연결되는 모습은 아름답다. 특히 소설을 쓰면서 이야기 속에서 흥미로운 사연을 찾아내고, 그 사연을 더 재미있게 꾸미는 일을 해 오다 보니, 이렇게 짧은 옛이야기의 소재를 다양하게 살펴보는 시도가 즐거웠다. 이렇게 보면 과학은 문학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틀이고, 한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서 더 넓게 세상을 보게 해 주는 도구다. 이런 일에는 다양한 주변 정황을 따져 가며 사실을 추측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추리소설 속 탐정 같은 재미도 있다. - page 10
그 재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이 책.
한번 읽어보고 문학과 과학, 역사 속 상상에 빠져보는 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