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1883년에서부터 1902년 사이에 발표된 작품들로, 체호프 문학의 초, 중,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완성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초기 창작 시절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관리의 죽음>부터 <공포>, <베짱이>, <드라마>, <베로치카>, <미녀>, <거울>, <내기>, <티푸스>, <주교>까지 총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사소한 인물 군상을 통해 일상의 본질과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 단순한 유머를 넘어서 우수 어린 서정적 미학을 창출해 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서정적 미학(?)은 잘 모르겠고 등장인물들마다 어리석음에 마지막은 허무로, 근데 웃음이 삐져나오는 아이러니함에 뭐라 표현해야 할까...
애매모호호호호?!!
첫 작품부터 강렬했습니다.
주인공 '체르뱌코프'가 오페라 관람 중 장군의 뒤통수에 대고 재채기를 하게 됩니다.
뭐... 누구나 재채기는 할 수 있기에 그냥 넘어가려는 장군에게 굳이...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눈에는 원한이 담겨 있는걸.> - page 9
체르뱌코프의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로 그는 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흐느적흐느적 밖으로 걸어나갔다.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집에 돌아온 그는 관복을 벗지도 않은 채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죽었다. - page 12
네?
이걸로요?
왜죠?
이 작가분!
결말 처리가 기가 막혔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베짱이>.
언제나 묵묵하지만 지극한 사랑을 쏟아부은 의학계의 별과 같이 떠오르는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고서야 자신의 허영심과 어리석음을 탓하는 '올가 이바노브나'.
그녀는 남편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실수가 있었다고,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고, 인생은 아직도 멋지고 행복할 수 있다고, 그는 드물고 비범하고 위대한 인물이며 자신은 일생 동안 그 앞에서 공경하고 기도하며 성스러운 경외감을 느낄 것이라고......
「드이모프!」
남편이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녀는 그의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드이모프, 드이모프, 제발!」 - page 79
베짱이 같았던 올가.
그런 올가만을 바라보았던 남편의 심정과도 같았던 러브홀릭의 <인형의 꿈>.
갑자기 떠올라 흥얼거리곤 하였습니다.
한 걸음 뒤엔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댄 영원히 내 모습 볼 수 없나요
나를 바라보며 내게 손짓하면
언제나 사랑할텐데
- 러브홀릭의 <인형의 꿈> 중
티푸스에 걸려 혼수상태였던 '클리모프'.
깨어난 그는
열린 창문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칼날처럼 날카롭고도 우아한 빛줄기가 물병 위에서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거리의 눈은 이미 녹은 모양이었다. 햇살과 낯익은 가구들과 문을 보고 중위가 맨 처음 한 일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과 배는 달콤하고 행복한, 간지럼 태우는 듯한 웃음으로 떨려왔다. 아마도 최초의 인간이 창조되어 처음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느꼈음직한 끝없는 행복감과 생명의 환희가 그의 온 존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충만하게 채웠다. - page 155
하지만 그로 하여금 누이가 죽었음을 알게 되고서도...
이 무시무시한 뜻밖의 소식은 클리모프의 의식 속으로 온건하게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회복기의 중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적인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는 울며 웃었고, 이내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이나 지나서 겨우 잠옷 차림으로 파벨의 부축을 받으며 창가에 다가간 그는 음울한 봄날의 하늘을 바라보며 근처에서 낡은 전차 레일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심장이 고통으로 찌그러지는 듯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창틀에 이마를 기댔다.
「난 왜 이리 불행한가!」
그는 중얼거렸다.
「하느님, 나는 왜 이리도 불행합니까!」
그리하여 그의 기쁨은 일상의 권태와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 page 158
모순에 대한 쓰디쓴 비애감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티푸스>.
그 외의 작품에서도 그랬고 다 읽고 나서는 잽을 많이 맞아 KO 당한 느낌이었습니다.
읽으면서는 가벼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 군상에 대해 일러주었던 작가님의 이야기가 묵직이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서워요. 나는 천성이 심오한 인간이 못 되는지라 저승 세계니 인류의 운명이니 하는 문제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요. 뜬구름 잡는 일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다는 얘깁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생활 환경과 교육이 나를 견고한 거짓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습니다. - page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