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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3월
평점 :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는 작가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작품들 중에서 이 작품은 제130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다양한 사랑의 파국에 직면한 여성들의 섬세한 심리를 그린 단편 소설집이라 하였습니다.
그동안은 긴 호흡의 작품들로만 만났었기에 단편에서 전해질 그녀만의 섬세함이 어떨지 궁금하였습니다.
사랑이 끝나 가는 자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울 준비는 되어 있다』

12편의 이야기.
관계의 끝이라는 부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이들의 모습이 애처롭지만 덤덤하게 그려져 더 슬픔에 젖어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나고나면 저에겐 준비되지 않았기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잠시 방황하곤 하였습니다.
책의 제목인 <울 준비가 되어 있다>의 이야기.
영국 노퍽 지방의 해변 술집에서, 다카시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 아야노.
여행지에서 만난 그에게 흠뻑 빠져들게 된 그녀.
이들의 사랑은 조금 위태롭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싶었다. 또 언젠가 어느 한쪽의 마음이 변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떠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 page 185
결국 변해 버린 그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자신을 더 증오하는 그녀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던 때, 묘지를 즐겨 산책했다. 묘비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묘비명을 상상하기도 했다.
'여기 유키무라 아야노 잠들다. 강한 여자였다.'
하지만 실은 그때 이미, 울 준비는 되어 있었다.
"나츠키, 너 울보니?"
나는 조카에게 묻는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다가,
"가끔은 울어."
라고 대답했다. 우는 것은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나는 왠지 행복해진다.
"더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나츠키는 또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고는 머리를 어깨에 닿을 정도로 갸웃하고서,
"모르겠어."
라며 강아지처럼 귀엽고 깜찍한 얼굴로 웃었다.
"이모는 강한데." - page 188 ~ 189
사실은 한없이 약했던 그녀.
이미 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참 씁쓸했습니다.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골>이었습니다.
어젯밤 설거지를 하던 시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미안하지만 나, 당신 동생 싫어."
...
"당신 집에 가면, 나는 있을 자리가 없는 듯한 기분이야." - page 76
그리고 반년 전에도 히로키에게 시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람 같은 거 안 피워. 피운 적도 없고. 하지만 당신하고는 헤어지고 싶어. 이런 마음, 바람피우는 것보다 더 잔인하지." - page 82
정작 바람을 피운 적이 있는 건 히로키였는데 정작 헤어지자고 얘기하는 그녀.
그런 그녀와 자신의 부모님 집에 다녀온 후 차 안에서 울고 있던 시호의 이야기가...
"우리 집 토스터 고장 났어, 알아? 나 어제 이 뽑았어. 이 뽑은 입으로 키스했고. 바람은 안 피우지만 키스 정도는 해. 냉장고 청소 오래 안 했으니까, 아마 구석에 작년에 먹다 남은 채소하고 햄, 치즈 그런 게 들어 있을 거야. 알고 있었어? 우리 살기는 같이 살아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어, 알아, 그거?" - page 87 ~ 88
소통의 단절 끝에 찾아온...
그렇게 혼자서 울 준비를 했던 시호가 전한 마지막 말이...
"우리 한때는 서로 사랑했는데, 참 이상하지. 이제 아무 느낌도 없어."
시호가 말했다.
"당신, 그거 어떻게 생각해?" - page 89
사람과 사람 사이.
한때는 사랑했지만 결국 이별할 수밖에 없는 이들.
그리고 그 속에 가리워졌던 눈물들.
우리 모두도 울 준비가 되어 있기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감하며 가슴 저미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해 봅니다.
저자가 말했습니다.
가령 슬픔을 통과할 때, 그 슬픔이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도 그사람은 이미 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잃기 위해서는 소유가 필요하고, 적어도 거기에 분명하게 있었다는 의심 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었겠죠. - page 210
하지만...
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 말이 참으로 슬프게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