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지음, 이연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아이는 집에서 엄마가 키워야만 해."


"일도 안 하는 전업주부가 지칠 게 뭐가 있다고.

하루 종일 집에서 애들이랑 놀기만 하면 되는 부러운 인생 아니냐."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

저 역시도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얼마나 눈치가 보이고 업무는 매일 쌓여있는데......

퇴근하면 쫌 쉬자."


"주말이니까 그동안 쌓인 피로 좀 풀자."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대화는 하지 않습니다.

아니, 제가 원하지 않아서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기대를 해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기에 그냥 입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책으로 만나게 되다니!


특히나 공감되는 문구에 책을 잡자마자 읽었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돌봐야만 한다? 육아와 가사는 여자의 일?

전업주부는 집에서 노는 사람?

말이 안 통하는 가부장제 꼰대 남자들을 향한 최후통첩!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지금까지 매우 긴 시간 동안 정말로 열심히 살아 왔다.

언젠가 마라톤 선수가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는데,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렇다. - page 7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38년 동안 대형 석유회사에서 정년퇴직한 '쇼지 쓰네오'.

길고 길었던 샐러리맨 생활로부터의 해방감에 순간 허전함도 있지만 역시나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이 더없이 컸습니다.


주말 아침.

죠난대학을 졸업한 뒤 데이토물산에서 전문직으로 일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서른 셋의 딸 '유리에'에게 그는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유리에 넌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나?"

"친구들을 보면, 전혀."

유리에는 카운터 너머에서 수도꼭지를 비틀며 물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정사니 스드메까지 정하고 나면 곧바로 임신을 위한 숙제가 기다리고, 임신하고 나면 입소 전쟁이라니까. 정말 힘든 모양이더라고. 숨 쉴 틈도 없을 만큼.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늘어나는 건 걱정뿐이라던데. 그 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다 괴로울 지경이야. 부럽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드는걸." - page 21

하지만 더없이 충격적이었던 유리에의 한 마디.

"그리고 또...... 난 아빠 같은 아버지를 보며 자랐으니까 말이야." - page 21


유리에와의 대화에서 냉정을 유지할 수 없어 대화 주제를 바꾸어 봅니다.

아내인 '도시코'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엄마는 대체 어딜 간 거냐?"

"메종 돌체에."

"또 거긴가." - page 23

10년쯤 전에 투자 목적으로 5층의 방 한 칸을 사 두고 부동산에 관리를 맡겨 두었는데 작년 말 즈음부터 빈방이 된 뒤부터 도시코는 빈 방을 청소한다며 종종 그곳엘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신의 물건들을 그리로 옮겨 놓더니 최근에는 거기서 지내는 일이 잦아진 도시코.

"엄마가 그렇게 말했니? 아빠랑 같이 있고 싶지 않다고."

"설마. 엄만 자기 자식 앞에서 아빠 험담이나 하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아내의 표본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렇지."

"그런 여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다 마음속에 담아 두는 타입이니까. 자기 혼자 꾹 참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된다고 생각하다 보니 결국에는 저렇게 돼 버리지."

"저렇게 된다니, 어떻게 됐다는 건데?"

"누가 봐도 후겐병이잖아."

"후겐병?" - page 24 ~ 25

현모양처였던 그녀는 남편이 원인인 병 '후겐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딸의 시선이나 말 속에 담긴 속내를 이제야 하나 둘씩 알아가다보니 어느새 자신은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어진 그.

환갑을 넘긴 남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쑥스럽지만, 문득 외로워서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인간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고독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쁜 나날에 가려져 있던 고독이란 놈은 한가해지는 순간 빠끔히 고개를 내미는 모양이다. - page 42


그러던 어느 날 아들 가즈히로가 퇴근길에 그의 집에 들르기로 합니다.

조심스럽게 입을 뗀 가즈히로.

"사실 오늘은 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어."

가즈히로가 말을 꺼냈다.

"실은 어린이집에서 애들을 데려오는 일을 해 줬으면 해서."

"설마 아오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거냐? 고작 세 살이잖아."

"마이가 일을 시작하는 거니?"라고 도시코가 물었다.

"마이는 입소전쟁에 실패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를 그만둔 거거든. 그때부터 다시 죽기 살기로 일자리를 구해서 겨우 파견사원으로 일하게 됐어. 다행히 올 4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게 됐는데, 통근 시간을 따져 보면 데리러 오는 시간이랑 1시간 정도 틈이 생기더라고."

"연장보육이란 게 있지 않니?"

도시코가 다시 한번 묻는다.

"그 어린이집은 연장보육을 안 해. 등하원도우미를 구할까 생각해서 알아봤는데 그렇게 되면 이것저것 문제가 커지더라고. 가족들이 봐 주는 게 제일 안심이란 결론이 났어."

"설마 너, 한 살짜리 렌도 어린이 집에 맡길 생각이냐?"

"그럼. 당연한 거 아냐? 마이가 출근한다니까?" - page 72 ~ 73


졸지에 아들 부부의 손주 두 명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데려 와 한 시간동안 돌보는 일을 하게 된 쇼지.

처음 그의 태도는 그야말로 가부장제에 꼰대 그 자체였습니다.

"단순히 돈 문제만이 아니야. 마이는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고."

"정신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애 둘의 뒤치다꺼리만으로 하루가 다 가는 매일매일을 살다 보면 미쳐 버릴 것 같다던걸."

"뭐?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안 되는구나. 엄마란 건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존재인데."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마이도 꽤나 지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말이야."

"일도 안 하는 사람이 지칠 게 뭐가 있다고. 하루 종일 집에서 애들이랑 놀기만 하면 되는 부러운 인생 아니냐. 남자들에겐 그런 태평한 삶이 불가능한데 말이다."

"그 점은 나도 아버지 의견에 동의해. 대낮에 공원에서 모래장난이나 좀 하는 걸 가지고 뭐가 그렇게 힘들다는 건지 솔직히 나도 알 수가 없다니까." - page 75 ~ 76


그런 그도 조금씩 눈이 트이기 시작합니다.

동창회에서 간만에 만난 친구 '아라키' 도 황혼이혼을 향해 가고 있었고 아내는 자신과 마주하는 것을 꺼리고 딸에게서는 '당신'이라는 말까지 듣는 현실에서 자신의 부주의함과 그도 모르는 사이 가족들에게서 멀어진 것을.

이제야 '가족'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아니,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기는커녕 난 도시코를 관대한 사람이라 생각하는걸."

"제가, 관대하다고요?"

"그럼, 그렇지. 나라면 그런 자식과 두 번 다시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을 테니 바로 이혼할거야. 그런데도 도시코는 부지런히 내 뒤치다꺼리를 해 주었으니까."

"이혼하면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요."

"그것 뿐만은 아닐 거야. 그 이유만이라면 정말 최저한의 가사노동만 하고도 만족했을 거야. 하지만 도시코는 언제나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써 주었지."

"어째서였을까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도시코가 원래 상냥한 사람이라 그랬을거야. 착한 사람이잖아."

"그렇게 말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동안 고생시켜서 미안했어."

"전 당신하고 결혼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응?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아뇨, 정말로요. 당신은 정년까지 성실하게 회사에서 근무하며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적은 용돈으로도 불만 없이 묵묵히 일해 줬어요. 그리고 도박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대출도 만들지 않았고, 성격도 온화했는걸요."

"고작 그것뿐이잖아?"

"고작 그것뿐이라고는 해도,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남자가 이 세상에는 무척 많다고 들었으니까요. 제 동창들 중에서도 남편의 게으름이나 빚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거든요."

"그런가......, 기뻐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 저도요." - page 363 ~ 364


아직도 우리 사회 역시 여자에게는 '모성'을 요구하고 있는게 현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첫 아이를 출산하고 아무것도 몰라 방황하고 두려웠는데 남편은 당연히 '엄마'가 되었으면 알아야하는게 아니냐는 듯이 이야기하는 바람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정도 자라 일을 하려고 했지만 사회에서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뿐.

지금은 어느정도 전업주부라는 타이틀에 적응하는 중이지만......


소설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라에서 세운 계획에 그대로 휘말린 거제. 노인들과 어린애를 돌보는 일을 여자에게 시키면 복지 쪽으로 돌릴 예산을 줄일 수 있으니께."

복지현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큰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그만 잔에 든 따뜻한 술을 홀짝 마셨다.

"언니야 말대로다. 나라에선 그런 걸 모성애라느니 가족애라는 단어로 포장해가꼬 서민들을 속일라 했지. 우리 같은 서민을 바보로 생각하고 있는가는 내 모르지만, 우리는 절대로 안 속을 기다"라고 작은누나도 열띤 목소리를 낸다. - page 195 ~ 196

지금은 '육아휴직'도 있고 사회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이는 아직도 미비한 변화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보다 여자들이, 엄마들이 사회에 의지하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솔직히 이 소설을 읽고나면 통쾌할 줄 알았는데 읽고난 뒤 멈추지 않는 눈물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마도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를 다시금 내다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만약 이 소설을 남편이 읽는다면 어떤 반응일지......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아이들이, 가정이, 사회가 존재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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