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이 없다
조영주 지음 / 연담L / 2019년 12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출판사 중 한 곳입니다.

'연담L'

페이지를 넘기는 극강의 재미를 선사하는 이 출판사의 소설들을 찾아읽곤 합니다.

『일곱 번째 배심원』으로 시작하여『내가 죽였다』, 『암흑검사 1, 2』에 이어 만나게 된 이 소설.

이 문장이 제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이 책들요. 누가 반전만 싹 찢어갔어요."

『반전이 없다』

 


첫 장에 나온 우리의 형사님.

친전은 참을성이 강했다. 한번 목표로 삼은 추리소설은 어떻게든 손에 넣었고, 아무리 재미 없는 추리소설이라도 일단 손에 잡으면 에필로그를 볼 때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잠복을 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대조가 오기 전까지 엔간해서는 소변도 보지 않았다. 지금 친전은 이 참을성을 한 남자의 미행에 쏟고 있었다. - page 13

자신의 휴대전화 속 얼굴과 비슷하다 못해 같은 사람임에 분명하다고 느끼지만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또다시 몸을 돌리며 발로 허공을 툭툭 차며 다시 한번 손에 든 휴대전화 속 사진들과 사람들의 얼굴을 비교해 봅니다.


안면인식장애.

1년 전 그는 사람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그는 성산초교 뒷골목 어린이집으로 발걸음을 향합니다.

손자 '나무'를 데릴러 가는 길.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 끼여 있는 손자를 찾는 일은 지명수배범 찾기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결국 포기하고 하원을 돕던 교사에게 말을 붙입니다.

"저기, 미안한데......"

"어머, 이 형사님." - page 20

손자의 손을 자바고 집으로 오는 길.

평소 손자는 어린이집을 나설 때마다 "골목 대탐험!"하고 외치는데 오늘따라 손자가 얌전합니다.

아니, 친전의 뒤에 숨다시피 하고 연신 두리번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비 할배가 무서워." - page 21

그런데 손자가 뜻밖의 요구를 합니다.

"할부지, 우비 할배 잡아줘!"

"응?"

"우비 할배 잡아줘. 할부지는 나쁜 사람 잡아주는 사람이잖아." - page 22


손자를 위해 어린이집 앞에서 잠복을 시작합니다.

일주일째, 우비 할배 찾기는 전혀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합니다.

- 뭐 하냐.

친전보다 먼저 정년을 맞은 후 소일거리로 구청에서 시간제 근무를 하고 있는 50년 악우 김씨가 호출을 합니다.

그런 악우의 호출이다.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친전이 생각하는 의리였으니까. 이런 생각으로 발을 서두른 친전은 얼마 못 가 당황하고 말았다. 문제의 목적지, 붉은 기와를 얹은 단층집에는 친전보다 먼저 온 불청객이 있었다. 그 불청객의 이름은 죽음이었다. - page 28


천장은 뚫려있고 고인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뭉개져버린, 책더미 속에 우비를 입은 채 사망한 그를 보고 친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살인이다." - page 36


딸랑.

한참 책을 보던 친전의 귀에 익숙한 2층 현관문에 달린 방울 소리가 납니다.

"이천진 선배님, 어디 계십니까?" - page 46

여자는 낯선데 말투는 익순한 그녀.

"거기 계시는군요. 김나영입니다. 방금 전 현장에서 뵌." - page 46

정의정의 파트너인 그녀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책들을 가지고, 그것도 사건현장에 있던 책들.

"이 책들 말이죠, 반전이 없는 거 아셨어요?"

친전은 그 말에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칫했다.

"누가 반전만 싹 찢어갔어요."

...

그런데 정말 반전이 없었다. 하나같이 뒤쪽이 한 뭉텅이씩 잘려나갔다.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에요."

나영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살해 도구가 아닌데도 반전이 찢긴 책이 하나 더 있더라고요."

"그 책이 뭡니까?"

"이거예요."

나영이 내민 일곱 번째 책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ABC 살인 사건》이었다. - page 47 ~ 48


그렇게 그는 나영과 함께 사건 현장에 돌입하게 됩니다.

살인 사건은 반전이 사라진 추리소설 속 단서를 쫓으면서 또 다른 살인 사건을 맞이하게 되고 그 사건들 사이엔 20년 전의 추악한 진실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초이세는 조금 더 뜸을 들이더니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판권 페이지에 이름이 올라온 인물들을 차례로 죽이는 거요. 이왕이면 그 인물들의 이름이 실린 책으로 때려죽인다면 더 그럴듯 하겠죠. 그거 아십니까? 책은 아주 훌륭한 살해 무기가 될 수 있어요. 특히 몇 권이고 묶어서 때리면 엄청난 흉기가 되죠."

친전은 그 말에 대꾸할 뻔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두 사람이나 책에 마ㅏㅈ아 죽었거든요, 라고.

"한 가지 더 여쭤봐도 될까요?"

가까스로 친전이 입을 다문 건 나영이 재빨리 다른 질문을 꺼낸 덕이었다.

"선생님께서 그 소설을 쓰신다면 말입니다. 만약 살인자가 피해자에게 지정된 옷을 입힌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살인자가 자신의 우비를 피해자에게 입힌다면, 살해한 후 피해자의 두 손을 모아 가슴 위에 포개어 올려준다면요."

'이건 거의 수사 협력 수준이 아닌가?'

친전은 지나친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초이세의 반응을 살폈다.

"우비는 맥거핀." - page 178 ~ 179


소설의 마지막엔 천진이 관계자를 불러낸 후 추리 쇼를 하게 됩니다.

마치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처럼 말입니다.

끝내 밝혀진 20년 전 살인 사건의 진상과 현재 일어난 살인 사건의 연관성.

그리고 추리 쇼가 끝난 후.

"죄송합니다."

추리소설과 꼭 같은 일이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 죄송합니다......" - page 336

참으로 씁쓸하였습니다.


천진 형사의 모습은 애거사 크리스티에 등장하는 탐정 프와로와도 닮아있었습니다.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색형 탐정.

그리고 사건을 진실을 향해 가는 이들의 모습.

"사건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네요. 일기예보 같은 거 말이에요."

"몰랐습니까?"

"뭘요?"

"사건의 일기예보, 그게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거.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의 정보를 모아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을 예측하고,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일 말입니다." - page 236

그들이 있기에 억울하게 죽은 이가 없음을,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추리 소설에서 또 추리 소설이 등장하여 너무나 반가웠고 흥미로웠습니다.

역시나 '반전의 묘미' 때문에 오늘도 추리 소설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금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찾아읽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 놓쳤던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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