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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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뭔가 심상치 않은 이 할머니.

깃털 달린 밤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은빛 반짝이가 잔뜩 달린 원피스 정장을 입은, 눈이 커다랗고 뺨이 발간 그녀는 어디에 있다가, 무슨 일로 돌아온 것일지 궁금하였습니다.

『할매가 돌아왔다』

 


2012년 한여름 날.

귀신을 본 건 아니었습니다.

분명 사람인데......

할머니가 돌아왔다. 광복을 코앞에 두고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할머니가, 사진은 물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그분 얘기를 꺼내지 않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처럼 그렇게 묻혀 있던 정끝순 여사가 어느 날 오후 갑자기 우리 집 앞에 나타나 벨을 눌렀다. - page 9


평소 조선 시대 마지막 선비의 모습을 하시는 할아버지는 대뜸 삿대질과 욕설을 퍼붓지만 정작 무덤히 넘겨버리시는 할머니.

그녀가 돌아온 이유.

"무슨 병에 걸리진 않았다. 그것 빼곤 네 말이 다 맞아. 내가 너희들 가슴에 생 못질을 하고 떠났다가 이제 핏덩이가 할머니가 되니 돌아왔구나. 내 잘못은 내가 잘 안다. 지난 세월, 그 긴 시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내 죄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 한번 보고 싶었다. 그것뿐이다. 얼마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잠시만 머물다 가고 싶다. 안 되겠니?"

...

"그동안 돈을 좀 벌었다. 꽤 된다. 이젠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 난 더 이상 돈이 필요 없는데, 복지 단체에 기부하려니까 왜 그렇게 허전한지. 이제 와서 핏줄 얘기하는 걸 참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꼭 너희들, 바로 내 핏줄에게 물려주고 싶구나. 이번에 꼭 너희들에게 주고 가고 싶다. 물론 받으려 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오래 있지 않을 테니 좀 봐다오." - page 37 ~ 38

할아버지만 빼고 나머지 식구들은 각자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애들 아빠 30분 내에 도착한대요, 어머니." - page 40

그렇게 할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됩니다.


할머니 등장 일주일째, 가족들은 할머니의 그동안의 안부를 궁금해 합니다.

"궁금한 게 당연하죠. 가족이니까 어머니의 지난 생활을 알고 싶은 거죠."

"난 너희들 지난 세월을 묻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다 들려드렸잖아요."

"그건 너희들이 그런 거지. 내가 물은 건 아니지."

"가족이라면 당연히 얘기하는 게 맞지 않나요? 안 그래요, 여보?" - page 97 ~ 98

하지만 정작 그들이 궁금했던 건......

"아니다, 너희는 내 재산이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달자가 여기저기 안 알아본 곳이 없다. 내게 너희들 소식을 들려준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 이준용 목사, 바로 부여에서 우리 아랫집 살던 꼬마 아이 말이다. 어제 그 아이와 통화를 했다. 달자가 거기까지 연락해서 내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것을 알아냈지. 그리고 달자는 다른 건 안 물어보고 택시 회사만 물어봤더군." - page 98

참으로 숙연해집니다.

그리고 이어진 할머니의 이야기.

"난 너희에게 거짓말한 적 없다. 일본에서 택시 회사로 돈 번 것은 맞다. 거기서 미국으로 갔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샤롯데시에 정착해서 살다가 부흥 설교를 하러 온 이 목사를 만나 너희 소식을 들었고 무려 3년을 고민하다 이번에 찾아왔다. 함께 산 남자는 둘이 있다. 일본인 하나, 미국인 하나. 일본인과는 이별했고 미국인과는 사별했다. 자식은 없었다. 너희 둘이 다야. 달자야, 넌 이런 것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

...

"이해한다.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희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내가 일주일째 돈 얘기를 안 하니까 혹시 내가 속이는 게 아닌지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한다. 내가 약속하마.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유산을 물려주겠다. 그러나 누구에게 얼마를 주느냐는 순전히 내 마음이다. 가족 중에 날 사심 없이 대하는 건 동석이 하나뿐이어서 우선 손자에게 피시방 차릴 돈 1억을 주기로 한 거다. 동석이가 집안의 자아손이니 당연한 것이지. 그렇지 않냐, 달수야? - page 99


마냥 웃기지만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떠난 이유를 알고나니 더 그랬습니다.

"넌 그때도 날 믿지 않았어."

할아버지가 느리게 반응했다.

"뭔 말이여?"

"그때 짝불이, 너하고 숙부님하고 박종세가 통매네 헛간에 숨어 있다고 밀고한 거 말이여. 그거 나 아니었어."

"이번엔 또 뭔 수삭지여. 천하가 다 아는 일을 아니라고?"

"그거 밀고한 거 홍갭이여, 홍갭이. 순사보 하던 홍갭이 말이여. 그래 놓고 그놈이 나한테 뒤집어씌운겨."

"난 억울혔어. 하지만 아무도 날 믿어주지 않었어. 홍갭이, 그 엉큼한 놈이 평소 마을 어른들에게 잘혔지. 겉으로만 말이여. 난 최가들이 속으로는 다 자바아먹지 못혀서 안달하는 며느리 아닌 종년이었고." - page 166 ~ 167


"그런 년이 왜 도망을 쳤누?"

"내가 분명히 그때 종우 도련님 통해서 너한테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기별을 넣었지?"

"몰러. 기억 안 나."

"그런데 네 대답은, 기막혀서, 날 개잡년이라고 하면서 세상이 바뀌면 반드시 돌아와서 맷돌로 갈아버리겠다고 혔어, 안 혔어?"

"민족을 배신하고 지아비를 배신한 년인데 당연히 그래야 혔지."

"넌 마누라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 page 167


하지만 할머니가 자신의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외친 이야기는 가슴이 찡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런 스토리다. 그러니까 난 짝불이라는 최씨 가문 장손보다도 경성의 휘중당, 그 빨간 벽돌과 담쟁이덩굴, 그리고 빛나던 교복과 결혼한 것이고 혼인 한번 하려고 지독하게 맞다가 죽을 뻔했고 그 넓은 강경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기적 같은 혼인을 했고 혼인 후에는 참 눈물 쏙 빼는 시집살이를 했다. 그게 전부야. 하지만 혹시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래도 난 짝불이를 선택할 거야. 그게 그렇더구나. 사람이 아무리 머리로 산다고 해도 한번 가슴이 동하면 머리 같은 건 정말 쌀 한 톨보다도 못한 게 되더라고. 나중에 후회를 해도, 다시 그 순간이 돌아오면 어쩔 수 없이 또 가야 하는 길. 이제 죽을 때가 돼가니 비로소 알 수 있단다. 그게 사람 사는 길이야. 뜬구름 같은 거 말이야. - page 217 ~ 218


할머니의 한.

결국은 가슴에 묻힌 채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젠 여름도 갔구나. 나도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조금 더 있다 가세요."

"아니야, 사람은 올 때와 갈 때를 잘 알아야 한다."

"기분이 어떠세요?"

"서럽다. 내 여행도 이젠 막을 내리는구나. 나와 함께 내 일기를 썼던 모든 이가 다 죽었구나. 나 하나 남았어."

"그래도 억울한 누명을 풀었으니 기분은 후련하시죠?"

할머니가 피식 웃었다. 이런 웃음은 처음이었다.

"한 잔 더 하세요."

할머니는 한 잔을 더 들이켜곤 낮은 목소리로 금발의 제니를 불렀다. 그런 생각을 했다. 세월이 한 100년 흐른다면, 나도 죽고 나면 이 할머니의 모진 인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진실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 page 322 ~ 323


금발의 제니.

할머니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이야기.

 

돌아보면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는 그 말......

자꾸만 맴돌았습니다.


웃으면서 읽기 시작하였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책장을 덮어야만 했습니다.

할머니의 가슴 속 '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나의 할머니의 이야기였고 엄마의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행복이라고 일러준 할머니의 가르침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부디 할머니의 앞날에도 행복이 가득하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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