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공포증
배수영 지음 / 몽실북스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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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전 연재를 보았었습니다.

짜릿한 스릴을 맛보았기에 더 이 책이 나오길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었어? 내가 너의 저승사자란 걸!

넌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게 될 거야."

『햇빛공포증』


2015년 서울, 하얀 방

남자의 의식은 가물가물했고 몸은 포박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차가운 손이 남자의 이마에 무언가를 붙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눈을 떴지만 그의 시야에 잡힌 것은 얼굴 위를 오르내리는 하얀 소매뿐이었다. 그는 낮게 신음했다. 갈라진 입술을 달싹여 보았지만 목구멍이 꽉 막혀 작은 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 page 11


나이는 서른다섯, 직업은 경비행기 조종사인 '김한준'.

이틀 전 P 아파트 낡은 엘리베이터에 거울을 보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꽃다발을 등 뒤로 감춘 채 12층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딩동.

도착 신호음은 났는데 문은 열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열림 버튼을 누르려 하자 엘리베이터 안의 조명은 나가고 기이한 마찰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하강하기 시작합니다.


의식을 잃은 그.

한참 뒤 의식을 찾은 그는 구조대원에 의해 열릴 듯 말 듯 갈라진 문 사이로 비친 새하얀 빛의 덩어리에 순간 그의 뇌리에 번쩍 스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어두운 방, 누군가 성큼성큼 다가와 열쇠 구멍을 휘젓는 소리. - page 14

또다시 그는 눈부신 빛 아래 참회하듯 고개가 떨구어지면서 천천히 몸이 고꾸라집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상에 있었습니다.

"오늘은 2015년 11월 5일이고 지금 시각은 오후 6시입니다. 김한준 씨는 어제 오후 5시경 입원하셨고 약 24시간 수면하셨습니다. 가벼운 찰과상 외에 특별한 외상은 없기 때문에, 담당 의사였던 정 선생님은 조금 전 퇴근하셨습니다. 내일부터 제가 김한준 씨 담당이고요." - page 16

특별한 외상도 없다면 퇴원하는게 맞을텐데 자신을 담당한다는 의사.

김주승, 정신과 전문의, 성 루시아 종합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 page 17

자신이 정신과에 있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주승.

"김한준 씨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림과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발작 증세를 보이며 실신했습니다. 드물지만 햇빛공포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환자분의 증상이 그 병과 정확하게 일치하기에 빛을 차단해 놓았습니다만."

"무슨 공포증이요?"

"빛이 노출되면 몸에 경련이 오고 구토를 하거나 근육이 마비되기도 하는 병입니다. 심한 경우 호흡 곤란과 함게 패닉 어택(panic attack)이 오기도 하죠. 내일부터 검사와 치료를 시작해야 하니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시는 게 좋을 겁니다." - page 19 ~ 20


한준과 주승의 팽팽한 긴장감 사이에서 평생 그의 가슴속에서 하나의 질문이 메아리칩니다.

'넌 누구냐...' - page 37


그리고 벌어지는 악몽보다 더 끔찍한 현실.

왜 주승은 그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일까!

주승과 한준은 무슨 관계였던 것일까!

한준은 결국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소설은 폭풍우처럼 몰아치면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치 않도록 하였습니다.


한준에게 던진 주승의 말 중 인상깊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게 네가 원하는 건가? 내게 혼란을 주는 것!"

한준의 외침에 주승이 제법이라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뇌는 참 묘해."

주승은 의기양양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뽐내듯 말했다.

"자극하기 위해 던진 말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그 말의 진위여부를 따져 보게 되거든. 자기도 모르는 새에 신뢰의 벽은 이미 허물어지기 시작한 거야."

"지금 나한테 뭘 하려는 거야..."

한준은 꽉 잠긴 성대 사이로 겨우 소리를 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말이야. 너의 무의식에 불행의 씨를 심는 일이야. 의심 한마디를 툭 던져 주기만 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씨앗이 심기거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씨에 물을 주고 거대한 나무로 키워 내어 마침내 불신과 공포라는 열매를 얻게 돼. 애초에 그 검은 씨앗을 심고 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지."

"..."

"기억도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조종 가능해. 기억을 불러낼 때 작은 의심의 말과 함께 아까 내가 주사한 약까지 동시에 넣어 주면, 효과는 치명적이지. 그 약이 바로 사람의 생각과 기억을 사로잡는 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촉매제거든. 철옹성같던 믿음도 사랑도 곧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 page 193


"내가 원하는 건... 너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등을 돌리게 하는 거야. 널 과거의 기억 속에 가둘 뿐만 아니라, 너로 하여금 현재를 의심하게 만드는 거지. 연인까지도 말이야. 너를 둘러싼 세상은 결코 안전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 줄 거야. 넌 영원히 외로움과 공포라는 감옥에 갇혀 있게 될 거야. 네가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 난 그걸 원해." - page 196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인 냥 느끼는 주승을 보며 오히려 그가 스스로 자신의 무덤 속에 고립되어 영원히 외로움과 공포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아마 소설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본디 자연에는 자비도 은총도 없다. 자연이 평화롭다든지, 자연은 서로 빼앗지 않는다는 식의 유토피아적 이론은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소리다. 나무는 광합성을 하기 위해 그늘을 드리움으로써 주변의 식물들과 경쟁을 한다. 흙 위의 잔디들은 살아남기 위해 양분과 햇살을 따라 뿌리를 움직여 끊임없이 구역을 이동한다. 그들은 그저 한가롭게 바람 가는 대로 잎을 나풀대는게 아니다. 생존에 최적화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시든 몸을 버리며 치열한 영역 투쟁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고군분투가 없는 것은 삶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화사하고 찬란한 것을 싫어한다. 화사한 것에는 고군분투가 없다. 찬란한 것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초기의 목적을 망각하게 만든다. 반짝이는 것은 유혹이다.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어둡고 축축한 땅속에서 뿌리가 사력을 다해 단단한 흙 위로 솟아오르면, 찬사를 받는 것은 언제나 꽃의 몫이다. - page 267

언제나 찬사를 받는 것은 꽃의 몫이라는 것......

그렇지만 꽃이 피기까지의 치열함이 결국 '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어둠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 뒤에 비춰질 빛을 보지 못한다면 결국 어둠의 나락에 빠져 자신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 상처와 두려움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 대면하게 된다면 그 어둠은 씨앗이 되어 결국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읽으면서 '나비효과'가 떠올랐습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

그 미세한 변화가 일으킨 예상치 못했던 결과.

잠시 책을 덮고 후폭풍이 잦아들길 기다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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