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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시 - 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당신에게
정진아 엮음, 임상희 그림 / 나무생각 / 2019년 4월
평점 :
무언가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엄마의 음식'입니다.
철부지 어린 시절엔 그토록 먹기 싫다고 투정부리곤 했었는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특히나 아플 때 생각나는 건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그 음식.
그래서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만날 때면 읽기 전부터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짐을 느끼곤 합니다.
아마도 음식 하나에 사랑이, 정성이, 그리움이, 그리고 위로가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엔 만나게 된 이야기는 '시'였습니다.
솔직히 '시'에 대해선 막연한 선입견 - 어렵다, 어렵다, 어렵다......-을 가지고 있었기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음식'과 관련되어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반응하였습니다.
『맛있는 시』

음식에 관한 시가 이렇게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작가가 전한 이야기.
생굴을 넣어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가 구워지는 동안 불고기를 볶아 채 썬 대파를 올릴게요. 새로 꺼낸 배추김치를 먹기 좋게 썰고 달달 볶은 묵은지에 데친 두부 몇 조각도 곁들이겠습니다. 자, 고슬고슬 갓 지은 밥 한 그릇 내어놓습니다. 당신을 위한 '시 밥상'이에요. 맛있게 드세요. 마음대로 아무 때나 꺼내 읽으면 됩니다. - page 6
나를 위한 '시 밥상'은 어떤 음식이 있을지 기대하며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우선 제 앞에 '커피'가 놓여있었기에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마다>가 다가왔습니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마다
용혜원
한평생 살아가며
몇 잔의 커피를 마실까
커피를 마실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할까
커피를 마실 때마다
누구와 마실까
지나온 삶의 안타까움과
다가오는 삶에 대한 기대감 속에
늘 서성거리다가 떠나는 것은 아닐까
가끔씩 답답함을 터뜨리고 싶어
외마디라도 버럭 소리 지르고 싶다
커피를 마시고
깨끗하게 씻어 놓은 잔처럼
마시던 순간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마다
흘러가는 세월이 안타까워
외로움을 숨기고 싶을 때
에스프레소의 깊고
진한 맛을 느낀다
《우리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나무생각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왜 커피를 마실까......?
저 역시도 외로움을 달래고 싶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만 차마 말 못하고 위로를 얻고 싶을 때 마셨습니다.
왠지 오늘의 마무리는 에스프레소 한 잔이 될 것 같습니다.
결혼 생활과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밀가루 반죽>.
이 시를 읽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결혼 생활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였습니다.
밀가루 반죽
한미영
냉장실 귀퉁이
밀가루 반죽 한 덩이
저놈처럼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동그란 스텐그릇에
밀가루와 초면의 물을 섞고
내외하듯 등 돌린 두 놈의 살을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른다
우툴두툴하던 사지의 관절들 쫀득쫀득해진다
처음 역하던 생내와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도
하염없는 시간에 팍팍 치대다보면
우리 삶도 나름대로 차질어 가겠지마는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꾸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관한 기억》, 문학세계사
왠지 이 시는 남편과 함께 곱씹으며 읽고 또 읽으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인상깊었던 시도 있었습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이 시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암담한 현실도 처절한 절망도 지독한 아픔도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깊은 슬픔도, 그리고 무엇인가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는 작은 위로. 천근만근 무거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은 시인처럼 아무리 괴로워도 밥을 먹어야 합니다. 언젠가 잊힐 거라는 약속을 믿고 숟가락을 드세요. 좀 더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밥심이 든든한 위로가 된다는 걸.-page 129
여태 몰랐습니다.
밥에서 피어 오르는 김.
이 또한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 시를 읽고 난 뒤 밥 한 공기를 무심코 바라보다 그만 눈물이 나 버렸습니다.
짊어지고 있던 짐들이 하나 둘씩 내려놓아지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밥 한 공기.
그 든든한 위로를 오늘도 받았습니다.
정말 따뜻한 시 밥상이었습니다.
여긴엔 추억이, 사랑이, 따스한 포옹이 각기 다른 접시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엄마가 차려주었던 밥상이 그리워졌습니다.
조만간 엄마에게 찾아가 어린아이마냥 밥 해달라고 졸라야겠습니다.
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그대에게 전한 따뜻하고 맛있는 시였습니다.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