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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평점 :
나에게 '서른셋'은......
결혼하고 첫 아이가 한창 재롱을 부리던 그 때.
뭐든 처음이라 서툴기만 했던 그 때.
어리버리하고 정신없이 흘러가 딱히 기억에도 남지 않는, 그래서 더 아쉬운 그 때.
서른셋.
이 책을 보자마자 괜히 울컥하였습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그 시절이 그리워서일까......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제야의 종소리 서른세 번.
서른셋을 맞이한 '영오'의 이야기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사시던 곳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가져가라는 주인집 아줌마의 전화를 받고 간 그 곳.
영오는 상을 치르고 나서 그 낮고 어두컴컴한 방으로 가 살림살이를 처분했다. 처분이라고 해봤자 이부자리 두 채와 그릇 몇 개, 옷 몇 벌을 내다버리니 끝이었다. 비로 바닥을 쓸자 머리카락과 살비듬이 서로 엉겼다. 사람이란 결국 먼지인가, 싶었다. 담배 냄새가 먼지처럼 떠도는 방이었다. - page 28
다 정리한 줄 알았지만 싱크대 아래에 있던 고물 압력솥.
압력솥을 옆구리에 끼고 터덜터덜.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압력솥 뚜껑을 열어보니 수첩이 있었습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글자엔 영오의 이름을 포함해 세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홍강주
문옥봉
명보라
사실 그들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빚쟁이?
빚이 없는 아버지에게, 오히려 천만 원짜리 흑자 인생이었던 아버지에게 과연 그들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며 그렇게 아버지의 흔적을 알게 된 영주.
세상에는 어떻게 하다 보니 어떻게든 되어버리고, 지나고보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투성이다. - page 69
이 말처럼 어떻게 하다 보니 아버지와는 사이가 멀어지게 된 영오를 보고 있노라면 제 모습과도 흡사 닮아보였습니다.
저도 어느 순간이었는지 아버지와 서먹한 사이가 되었고 결혼을 한 뒤 아버지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막상 다가가질 못하는 내 모습에......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유가 있든 없든, 많든 적든,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 가시처럼 기억에 박히기도 한다. 어떤 틈은 희미한 실금에서부터 벌어지고, 어떤 관계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만으로도 망가진다. - page 69
아이와 어른의 차이.
"애들은 방황하는 거지 고집부리는 게 아닙니다. 고집은 손에 쥔 걸 놓기 싫어하는 거구요, 방황은 길을 찾아 헤매는 거예요. 이 길이 아니구나 싶으면 다른 길로도 가본다구요. 그런데 머리 크면 달라지죠. 남이 하는 소리가 개뿔 먹히질 않아. 고집만 세져가지고." - page 130
그래서 아이가 어른보다 더 낫다는 것.
저는 이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김밥을 다 먹은 뒤에, 개나리아파트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추웠지만 걸을 만했다. 배 속에는 문옥봉 김밥이, 주머니 속에는 도로시 개떡이 있는데 추위쯤이야. 목공소가 보이자 미지는 느긋한 나그네처럼 목련나무로 다가갔다. 겨울이지만 가지 끝에 사알짝 변화가 생긴 것도 같았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마음을 다하여 보면. - page 163
누구라도 마음을 다해, 자세히 보면 다 보이는 것인데......
왜 보지 않는 것인지.
아니, 왜 보려하지 않는 것인지.
영오는 결국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 외친 이야기는 가슴 저미게 들려왔습니다.
영오는 아버지의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유골 단지 안에 비집고 들어가 웅크리고 싶었다. 가루처럼 부서지고 흩어졌으면, 심자아이 딱딱한 뼈였으면. 아버지에게는 전화를 걸듯 목소리를 내어 말하고 싶었다.
"저기......"
...
"어, 어떻게든......"
...
"살게요. 그냥 살게요. 오늘 하루, 내일 하루, 운 좋게 모레가 오면 또 하루 더......" - page 271
잠시 제 머리를 스쳐간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가 아버지를 그리면서 외치던 대사.
그리고 마지막에 나왔던 알프레드 디 수자의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 떠올랐습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의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영오'라는 이름.
"영오란 이름이 말이죠, 다분히 수학적이거든요. 0과 5. 그래서 쩜오."
...
"아저씨는 나머지 0.5를 찾아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
"오까지 다섯을 합하면 1이 되잖아요. 0.5 더하기 0.5는 1." - page 267 ~ 268
더 이상 그녀의 서른셋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고나니 책의 앞표지에서 던진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외로운 사람인가요?
나는 외로운 사람일까?
아니었습니다.
저에겐 저를 채워주는 가족들이 있기에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오의 기적과 감동이 잔잔히 저에게 스며들어 가슴 따뜻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