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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적의 벚꽃』

이 소설을 읽게 된 계기는 이 문구때문이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언급한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가 바로 왕딩궈이며
그 총체가 《적의 벚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왠지 이 작가의 글이 은연중에 다가와 강한 여운을 남기고 갈 것만 같았습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주인공 남자인 '나'와 그의 아내 '추쯔', 명망 높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걸로 유명한 '뤄이밍'과 그의 딸 '뤄바이슈'.
이렇게 네 명의 인물의 이야기가 '나'와 '뤄바이슈'의 대화를 통해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씁쓸함을 아는 사람만이 커피의 묵직한 향기를 폐부로 받아들여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는 고독한 영혼을 깨워낸 뒤, 터져 나오려는 신비로운 탄식을 욱여 삼켜 비루한 식도와 목구멍 사이에서 수줍게 맴돌게 할 수 있었다. - page 31
자신을 떠난 아내를 기다리며 문을 연 카페에 찾아온 노인.
그 노인으로 하여금 '어둠'이, 그리고 '상처'가, 결국은 '용서'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의미를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언젠간 지게 되는 벚꽃의 운명으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내가 너의 순수함을 사랑하는 건 운명이야. 네가 예뻐서도 아니고 남자의 본능 때문도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건 비가 쏟아지던 그날 오후 처음 본 내게 손짓을 했던 너야. 특별할 것 없는 그 동작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어. 넌 나를 가족처럼 생각했던 거야. 너 자신도 몰랐겠지만. 구부러진 작은 손가락. 천사 만 명이 하나씩 떨어뜨린 만 개의 깃털 중에 유일하게 바람에 날아가지 않은 깃털 하나가 그 순간 내 인생 속으로 날아 들어왔어. - page 122
이렇게 순수하게 사랑을 했던 나와 추쯔.
그런 그녀가 '뤄이밍'과의 불륜을 저지르고 실종되면서도 그녀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
나는 앞으로 어디에서든 추쯔를 기다릴 거예요. 그녀에게 아직 들려주지 못한 얘기가 있어요. 염소 이야기요. 그 염소룰 내가 미워하는 아버지에게 드릴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도둑맞았죠. 결론은 이렇게 간단해요. 한마디로 하면, 내 이야기는 염소 한 마리의 이야기예요. 남자의 슬픔은 그렇게 작아서는 안 돼요.너무 작으면 인생에 파고들어왔을 때 영원히 뽑아낼 수 없으니까요.
바이슈 씨, 추쯔는 내 인생의 염소예요. - page 303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
하지만 그 속에 가려진 슬픔이, 아픔이 보여서, 아니 그것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있어서 더 애잔하고 아련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 이야기가 가슴 속에서 울리고 또 울렸습니다.
벚꽃이 그를 병들게 한 것은 아니지만 위험한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시드는 벚꽃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뤄이밍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욕망의 부추김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을.
...
벚꽃이 없는 사진을 뒤집어 깊은 밤 독백 한 줄을 남겼다.
적은 꿈속에서 파멸시키고 벚꽃은 침대 옆에 흐드러지게 피었네. - page 291 ~ 292
무던히 적어내려가는 이야기 속에서 더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그 슬픔이 또다른 위로로 전해지면서 '운명'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끔 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타인의 비극을 내 것으로 삼아 속죄와 희망의 여정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잃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남자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녹록치 않은 인생에서 사랑을 빼앗기고 이상이 무너지고 미래가 박탈당한 순간의 이야기다. 이 비루하고 순수한 이야기를 인생의 은유로 삼아, 피할 수 없는 그 길에서 더 이상 빼앗기고 무너지고 박탈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 page 13
피할 수 없는 그 길.
알 수 없지만 가야하는 그 길 위에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에 잠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