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비들
데니스 루헤인 지음, 서효령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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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락한 이유이후 6년 만에 한국에 소개되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1970년대가 배경인 이야기라 커글린 가문 3부작에서 맛봤던 데니스 루헤인 특유의 시대물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무척 컸습니다.

작은 자비들197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파 서사와 딸의 복수를 위해 지옥행을 마다하지 않은 한 어머니의 투쟁기가 절묘하게 섞여있어서 영화에 비유한다면 당시의 혼란상을 생생하게 그린 다큐멘터리와 롤러코스터 같은 액션 스릴러가 한 화면에 절반씩 담긴 듯한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인종차별 서사의 출발점은 버싱(Busing)입니다. 1974년 보스턴 법원은 인종차별문제의 해소책이라며 각각 백인과 흑인학생으로만 이뤄진 두 공립고등학교에게 상당수의 학생을 맞바꿔 버스(Bus)로 통학시키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강제 전학을 통해 두 인종의 학생들을 섞어놓기만 하면 인종차별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거라는 안이하고도 무책임한 이 판결 때문에 가난한 백인들의 도시 사우디(사우스 보스턴의 애칭)는 대혼란에 빠지고 이내 격분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와중에 42살의 메리 패트는 조만간 버싱으로 인해 흑인학생들과 한 반에서 수업을 듣게 될 17살 딸 줄스 때문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런데 전날 밤 친구들과 외출한 줄스가 아무 연락도 없이 실종되고, 하필 같은 시간대에 흑인청년 한 명이 기차역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자 메리 패트는 두 사건이 연관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패닉에 빠집니다. 함께 외출했던 딸의 친구들은 물론 사우디를 장악하고 있는 마피아까지 찾아가 줄스의 행방을 묻던 메리 패트는 결국 믿고 싶지 않은 사실과 마주하게 되고, 그때부터 지옥행을 각오한 복수극을 준비합니다. 문제는 딸을 위한 복수극이 곧 흑인청년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버싱으로 인해 흑인들을 향한 혐오감이 극에 달한 사우디의 백인들의 눈에 메리 패트는 흑인을 위해 싸우는 백인여성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자비들은 지금까지 읽은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모두 1차원적으로 보이게 만들 만큼 묵직한 작품입니다. 가난한 백인들의 도시 사우디에서 벌어진 흑인청년 살인사건 미스터리와 한 어머니가 벌이는 무자비한 복수 스릴러를 그리면서도 이분법과는 거리가 먼 다층적인 인종차별 서사를 저변에 깔아놓아서 흔히 선악의 대결로만 포장되곤 했던 유사한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감과 깊이를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인종차별이 단지 흑백 간에 벌어지는 문제만은 아니란 점(가난한 백인 VS 상류층 백인), 또 인종차별에 대한 신념이란 게 실은 그때그때 개인의 처지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인종차별을 이용하여 물질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보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점 등 지금껏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인종차별의 이면을 집요하게 그린 대목들입니다.

 

주인공 메리 패트는 이 대목들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인종차별에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녀는 버싱과 흑인청년의 죽음과 딸 줄스의 실종을 겪는 동안 거듭 자신의 태도를 바꿉니다. 그것은 신념이 약해서도 아니고, 생각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줄스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인종차별에 관한 한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게 메리 패트의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줄스가 정글과도 같은 사우디에서 무탈하게 성장하기를 바랐던 탓에 자기도 모르게 백인의 우월감을 주입했던 일에 대해 메리 패트는 처절할 정도로 자책합니다. 그런 심정에서 총과 무기를 집어 들고 복수에 나서는 그녀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은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리 패트의 복수극은 조용하지만 잔혹하게 이뤄집니다. 납치, 협박, 폭행, 감금 등 그녀가 해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하지만 그 복수극은 조금도 짜릿하거나 통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수가 거듭될수록 메리 패트의 가슴속에 무거운 누름돌이 연이어 쌓이는 듯 느껴져서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배가될 뿐입니다.

 

작은 자비들은 쉽고 편하게 읽히는 스릴러는 절대 아닙니다. 따로 떼어놓아도 각각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구축할 수 있는 두 개의 서사가 절묘하게 섞여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각각의 서사가 지닌 무게감과 비극성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작인 우리가 추락한 이유에서 다소 아쉬움을 느낀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라면 작은 자비들을 통해 그때의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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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생님을 죽였다
사쿠라이 미나 지음, 박선영 옮김 / 시옷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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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인 사이카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중인 오쿠사와는 준수한 외모와 젊은 교사 특유의 친근감 덕분에 학생들에게서 호감과 지지를 받아왔지만, 여학생과의 부적절한 행위가 담긴 음란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 이후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교내 창고에서 근신하던 오쿠사와는 새 학기가 시작된 직후 전교생과 교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옥상에서 투신자살합니다. 하지만 그가 담임을 맡았던 반의 칠판에 누군가 내가 선생님을 죽였다라는 글을 남긴 탓에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학교 전체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2021년에 읽은 사쿠라이 미나의 죽인 남편이 돌아왔습니다에 그리 좋은 평점을 주지 못해서 읽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학교 미스터리의 유혹에 넘어가 집어든 작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사쿠라이 미나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였고, 미스터리 역시 지나치게 단선적인데다 나이브하게 풀려서 애초 그리 높지 않았던 기대감조차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인기교사 오쿠사와의 충격적인 자살 장면을 그린 프롤로그 이후 그와 자주 접촉했던 네 명의 학생이 한 챕터씩 화자를 맡아 최근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오쿠사와를 못 마땅히 여겼으며 출처불명의 음란 동영상을 다운받아 인터넷에 유포한 문제아 도베, 대학교 추천입학과 관련하여 오쿠사와가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고 여기며 원망해온 모범생 구로다, 오쿠사와를 남자로 사랑했지만 늘 거절당했던 모모세,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입시 관련 특혜를 받은 탓에 오쿠사와에게 그 이유를 집요하게 물어봤던 부잣집 아들 고미나토가 그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이어 오쿠사와가 화자인 마지막 챕터에선 그의 고교시절부터 옥상에서 투신한 순간까지의 삶이 그려지면서 미스터리의 진상이 공개됩니다.

 

칠판에 적힌 내가 선생님을 죽였다는 의문의 문구 때문에 미스터리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오쿠사와의 죽음은 과연 자살일까, 타살일까? 타살이라면 의문의 문구를 남긴 학생이 범인일까? 자살이라 하더라도 과연 오쿠사와를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끔 만든 간접적인 살인범은 네 명의 화자 가운데 누구일까?

네 명 중 적어도 세 명은 오쿠사와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 또는 책임이 있어 보입니다. 음란 동영상 자체가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지만, 화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동영상 외에 분명 다른 원인이 숨어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애초 동영상을 찍은 게 누구인지, 그걸 유포하여 어떤 이득을 얻으려 한 것인지가 독자의 궁금증을 계속 증폭시킵니다.

 

전작인 죽인 남편이 돌아왔습니다에 야박한 평점을 줬던 이유는 독자와의 게임을 불공정하게 만든 작가의 반칙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진실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맥스를 위해 입을 다물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생님을 죽였다의 경우 반칙까진 아니었지만, 이야기의 발단이 된 오쿠사와의 자살 자체가 설득력도 없고 공감을 얻기도 어려웠으며, 반전은 진작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단순한데다 그것이 과연 그를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할 만큼 파괴적이었는가, 라는 의문만 남겨서 역시 야박한 평점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남은 느낌은 약간의 억지가 섞인 계몽극이었는데, 다른 독자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읽었을지 나름 궁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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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간의 가족
가와세 나나오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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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하고 난폭한 남존여비 추종자 60대 하세베, 겉멋과 탐욕에 찌든 70대 노파 지요코, 속을 알 수 없는 시건방진 16살 소년 리쿠토,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고 희롱한 뒤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20대 여성 나쓰미. 인터넷을 통해 동반자살을 도모한 네 사람은 실행 당일 심야의 깊은 산속에서 뜻밖의 상황에 처합니다. 한 여자가 갓난아기를 유기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한 것입니다. 죽기 위해 모인 자들이 갓난아기를 살려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문제는 SNS에 올라온 영상 하나 때문에 네 사람이 갑자기 유괴범으로 몰렸다는 점입니다. 이어 각자의 개인정보가 무차별로 공개되고 마녀사냥과도 같은 추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네 사람은 아기를 유기한 범인을 직접 찾아내기로 합니다.


 

꽤 오래 전 부산영화제에서 자살관광버스라는 일본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동반자살을 모의한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하며 인생의 마지막 즐거움을 누린 뒤 사고로 위장하여 세상을 떠나려 했지만 우여곡절과 반전 끝에 기막힌 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입니다. ‘4일간의 가족의 등장인물 캐릭터와 대략의 줄거리만 보곤 자살관광버스초반부와 비슷한 유쾌한 스타일의 미스터리 혹은 감동 위주의 휴먼 드라마가 아닐까, 막연히 추측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읽는 내내 한시도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아기를 구하고 누명을 벗기 위한 네 사람의 분투는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로드무비 스타일 미스터리 스릴러였으며, 그들이 밝혀낸 사건의 진상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눈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 서사 역시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아서 여러 차례 독자의 눈가를 뜨끈하게 만들곤 합니다.

 

이야기는 자살관광버스처럼 다소 소란하게 시작됩니다. 동반자살을 위해 모였지만 네 사람은 서로를 공격하고 모욕하고 비난합니다. “그딴 일로 왜 죽어?”라는 훈계까지 늘어놓는 웃지 못 할 장면들이 연출됩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가 살해 목적으로 갓난아기를 유기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이들의 관계는 급반전됩니다. 정의감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잠시 보류하고 갓난아기 구하기에 뜻을 모은 것입니다.

이 대목까지만 보면 그다지 새롭지도 않고 기대감을 유발하지도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올린 SNS 영상 하나 때문에 졸지에 유괴범이 된 네 사람이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신상이 털리고 흉악한 범죄자로 몰리자 말 그대로 죽을 각오로 갓난아기 유기범 찾기에 나서면서 이야기는 독자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롤러코스터처럼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경찰에 신고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개인정보가 전부 노출돼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된 데다 손에 쥔 단서라곤 아기를 유기하던 여자의 흐릿한 사진 하나가 전부인 네 사람은 숱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당연히 의견 충돌도 자주 일어나고, 포기하자는 말도 수시로 나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네 사람을 한데 묶는 건 그들이 사부로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갓난아기입니다. 애초 못 본 척 하고 계획대로 세상을 떠났으면 그만이었겠지만, 깊은 산속에 버려졌던 사부로가 자신들의 마음 속 뭔가를 툭 건드린 그 순간부터 네 사람의 인생은 뜻밖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고, 이제 단순히 사부로를 살렸다는 안도감을 넘어 사부로를 죽이려 했던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까지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의지를 품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네 사람은 사부로를 구한다는 목적으로 매 순간 스스로를 치유했다. 지금까지 찾지 못한 다시 살 기회를 탐욕스럽게 잡으려 하는 것이다.” (p273)

 

고백하자면 읽기도 전에 다소 뻔한 전개가 예상된 나머지 초반부만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접을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4일간의 가족은 기대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 것은 물론 미스터리 스릴러와 휴먼 드라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제대로 잡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리 새롭지 않은 설정에서 출발했지만 매번 독자의 예상을 깨부수며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뽑아낸 필력도 눈길을 끌었는데, 덕분에 가와세 나나오의 다른 작품도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4일간의 가족외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이사부로 양복점이 유일한데, 기회가 된다면 그녀의 전공인 미스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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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트 영매탐정 조즈카 2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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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트영매탐정 조즈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원제는 ‘invert 城塚翡翠倒叙集’, 인버트 조즈카 히스이 도서집입니다. 처음부터 범행 장면은 물론 범인의 정체까지 드러내고 시작하는 도치서술(倒置敍述) 추리소설임을 제목에서부터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세 편의 중단편이 수록돼있는데, 각 수록작의 범인들은 주도면밀한 계획을 통해 자신의 범행을 자살 혹은 사고사로 위장합니다. 경찰마저 범인의 의도에 완벽하게 말려든 상황에서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는 조즈카는 매번 다른 방법으로 범인에게 접근한 뒤 집요한 심문과 물증 찾기를 통해 각각의 죽음이 살인에 의한 것임을 입증합니다. 이미 범인을 알고 있는 독자 입장에선 과연 조즈카가 범인이 달성한 완전범죄를 어떻게 깨부술지, 그 돌파구를 어디에서 찾아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식 탐정도, 경찰과 공식적인 관계도 아니지만 다양한 경위와 실적 덕분에 조즈카 히스이에게는 경시청이 다루는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 일부 권한이 부여되어있습니다. 조즈카는 (경찰읕 통해 입수한) 현장 사진과 보고서만 보고도 사건의 정황과 범인의 정체를 직감합니다. 이후 그녀가 할 일은 자신의 심증을 입증해줄, 그리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물증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완전범죄를 달성한 범인에게 접근한 조즈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이 영() 능력자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당신 뒤에 누군가 서있다.”라든가 이곳에서 사람이 죽은 것 같다.”는 조즈카의 말을 들은 범인들의 첫 반응은 대부분 경악 그 자체지만, 이내 그녀의 추리가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걸 목격하곤 내심 무시하거나 비웃거나 안도하곤 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완전범죄엔 결점이라곤 거의 없어 보여서 조즈카는 매번 난관에 부딪히곤 합니다. 정황은 분명하고 심증도 확실하지만 범죄를 입증할 물적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즈카는 누구도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은 사소한 단서나 용의자들이 무심코 내뱉은 별 의미 없는 진술을 통해 끝내 결정적인 추리를 이끌어냅니다. 완벽해보였던 살인이 실은 여기저기 허술한 실수투성이였음을 조즈카가 조목조목 짚어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서평을 읽은 독자라면 조즈카의 진실 찾기 도구는 영 능력이나 영시(靈視)가 아니라 뛰어난 추리능력임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조즈카가 정말 영매탐정 맞나?”라는 궁금증이 생길 텐데, 실은 조즈카에 관해선 작가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묘사한 탓에 저 역시 그녀가 정말 영매탐정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조즈카의 비서이자 도우미로 함께 살아온 지와사키 마코토마저 그녀의 진짜 캐릭터에 대해 잘 모르는 것으로 묘사돼서 독자의 궁금증을 더 증폭시킵니다.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언젠가 조즈카의 진짜 모습이 공개되겠지만, 지금까진 작가가 베일 전략을 구사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전작인 영매탐정 조즈카의 줄거리 요약 마지막 줄에 조즈카는 확실히 진짜 영매인 것으로 보임이라고 써놓은 걸 보면 그때도 헷갈렸던 게 분명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소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조즈카의 비서이자 도우미이며 경시청에 올릴 수사보고서 작성까지 떠맡은 마코토가 그 아쉬움을 적확하게 표현해줬습니다.

 

조즈카 히스이의 논리는 때때로 엉뚱해서 글로 정리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그런 것을 알 수 있나 싶은 대목을 자주 맞닥뜨린다.” (p127)

 

말하자면 뛰어난 명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지나친 비약인버트에서도 종종 목격된다는 뜻입니다. 조즈카의 조사와 추리 중엔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들도 많지만, 영 능력에 버금가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면 알아낼 수 없는 지나친 비약도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작가가 대놓고 보여준 단서마저 놓쳤다는 아둔한 독자로서의 한탄보다는 왠지 거부감이나 위화감과 함께 결과에 꿰맞춘 다소 무리한 변명이란 생각이 더 강하게 들곤 했습니다. 특히 도치서술 미스터리에서 이런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선지 역시 쉽지 않은 장르라는 걸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버트가 일본에서 출간된 게 2021년이니 만 3년이 넘었습니다. 조즈카의 진짜 모습이 궁금해서라도 신작 소식이 기다려지긴 하는데,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후속작은 (도치서술 미스터리가 아니라) 시리즈 첫 편인 영매탐정 조즈카처럼 영매 서사와 본격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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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실의 악마
최필원 지음 / 북오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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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클럽버티고 시리즈등을 기획했으며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운영자이자 영미권 스릴러 번역가로 활동 중인 최필원의 소설집입니다. 실은 고해실의 악마가 최필원의 첫 소설집이라고 짐작했는데, 책날개의 소개글을 보니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한 적 있으며, ‘고해실의 악마에 수록된 단편들 가운데 일부는 계간 미스터리를 비롯한 다양한 공모에 당선된 작품들이었습니다.

모두 15편이 수록돼있는데 그중 4편은 한 작품(표제작인 고해실의 악마’)이나 마찬가지여서 실제 수록작은 12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제작을 제외하곤 한 작품 당 평균 20~30페이지 분량이지만 제일 짧은 건 4페이지에 불과한 경우도 있고, 소재도 살인, 이라크전쟁, 복수, 사이코패스, 스너프필름, 가정폭력 등 무척 다채로워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고해실의 악마를 표제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아마도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압도적인 서사와 분량 때문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론 (모든 수록작을 아우르는) 이 소설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 역시 악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스스로 악마의 길을 자처한 인물도 있고, 악마의 피가 온몸에 흐르는 타고난 사이코패스도 있는 반면, 사소한 다툼을 벌이다가 순간적으로 악마의 기질이 폭발하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다양한 스펙트럼의 악마가 이끄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표제작인 고해실의 악마10년 전 끔찍한 사고 이후 신부의 길을 걷게 된 한 남자가 우연히 고해성사를 통해 10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게 된 뒤 벌어지는 참극을 다루고 있어서 비극적인 미스터리와 오컬트 호러의 냄새를 진하게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지만 최필원 본인이 번역했던 폴링 엔젤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는데,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괜찮은 호러영화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초단편이지만 반전의 맛이 짜릿했던 시스터즈’, 뜻밖의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흥미진진했던 작가의 여자비명’, 잔인한 블랙코미디 풍의 아들의 취미’, 악마라는 테마와는 무관했지만 불쑥 소름이 돋았던 태동등이 눈길을 끈 작품들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수록작에 살인과 폭력이 등장하고 그 수위 역시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들 때문에 읽는 동안엔 머릿속에 잔혹한 이야기로 입력되지 않았는데, 다 읽은 뒤 각 수록작의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이거, 진짜 센 이야기였네.”라고 뒤늦게 놀란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그래선지 개인적으론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들 대신 작가 자신이 번역했던 독한 영미권 스릴러 스타일로 쓰였다면 좀더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일부 작품에서 반전이 쉽게 예상된 점이나 너무 정직한 구성 때문에 재미가 반감된 점도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이는 어쩌면 취향의 차이 탓일 수도 있어서 나중에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인터넷서점의 작가 소개글에 따르면 틈틈이 신작 소설 재스퍼마계촌을 집필 중이라고 하는데, 제목만 봐선 전혀 다른 장르(스릴러 vs SF호러?)의 작품일 것 같아서 궁금증이 일기도 합니다. ‘고해실의 악마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집필 중인 신작 소설들도 머잖아 독자들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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