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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실의 악마
최필원 지음 / 북오션 / 2024년 10월
평점 :
‘모중석 스릴러클럽’과 ‘버티고 시리즈’ 등을 기획했으며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 운영자이자 영미권 스릴러 번역가로 활동 중인 최필원의 소설집입니다. 실은 ‘고해실의 악마’가 최필원의 첫 소설집이라고 짐작했는데, 책날개의 소개글을 보니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한 적 있으며, ‘고해실의 악마’에 수록된 단편들 가운데 일부는 계간 미스터리를 비롯한 다양한 공모에 당선된 작품들이었습니다.
모두 15편이 수록돼있는데 그중 4편은 한 작품(표제작인 ‘고해실의 악마’)이나 마찬가지여서 실제 수록작은 12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제작을 제외하곤 한 작품 당 평균 20~30페이지 분량이지만 제일 짧은 건 4페이지에 불과한 경우도 있고, 소재도 살인, 이라크전쟁, 복수, 사이코패스, 스너프필름, 가정폭력 등 무척 다채로워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고해실의 악마’를 표제작으로 선정한 이유는 아마도 다른 수록작들에 비해 압도적인 서사와 분량 때문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론 (모든 수록작을 아우르는) 이 소설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 역시 ‘악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스스로 악마의 길을 자처한 인물도 있고, 악마의 피가 온몸에 흐르는 타고난 사이코패스도 있는 반면, 사소한 다툼을 벌이다가 순간적으로 악마의 기질이 폭발하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다양한 스펙트럼의 악마가 이끄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표제작인 ‘고해실의 악마’는 10년 전 끔찍한 사고 이후 신부의 길을 걷게 된 한 남자가 우연히 고해성사를 통해 10년 전 사고의 진실을 알게 된 뒤 벌어지는 참극을 다루고 있어서 비극적인 미스터리와 오컬트 호러의 냄새를 진하게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지만 최필원 본인이 번역했던 ‘폴링 엔젤’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는데,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괜찮은 호러영화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초단편이지만 반전의 맛이 짜릿했던 ‘시스터즈’, 뜻밖의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흥미진진했던 ‘작가의 여자’와 ‘비명’, 잔인한 블랙코미디 풍의 ‘아들의 취미’, 악마라는 테마와는 무관했지만 불쑥 소름이 돋았던 ‘태동’ 등이 눈길을 끈 작품들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수록작에 살인과 폭력이 등장하고 그 수위 역시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들 때문에 읽는 동안엔 머릿속에 잔혹한 이야기로 입력되지 않았는데, 다 읽은 뒤 각 수록작의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이거, 진짜 센 이야기였네.”라고 뒤늦게 놀란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그래선지 개인적으론 담담하고 간결한 문장들 대신 작가 자신이 번역했던 독한 영미권 스릴러 스타일로 쓰였다면 좀더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일부 작품에서 반전이 쉽게 예상된 점이나 너무 정직한 구성 때문에 재미가 반감된 점도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이는 어쩌면 취향의 차이 탓일 수도 있어서 나중에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인터넷서점의 작가 소개글에 따르면 “틈틈이 신작 소설 ‘재스퍼’와 ‘마계촌’을 집필 중”이라고 하는데, 제목만 봐선 전혀 다른 장르(스릴러 vs SF호러?)의 작품일 것 같아서 궁금증이 일기도 합니다. ‘고해실의 악마’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집필 중인 신작 소설들도 머잖아 독자들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