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비들
데니스 루헤인 지음, 서효령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추락한 이유이후 6년 만에 한국에 소개되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1970년대가 배경인 이야기라 커글린 가문 3부작에서 맛봤던 데니스 루헤인 특유의 시대물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무척 컸습니다.

작은 자비들197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사회파 서사와 딸의 복수를 위해 지옥행을 마다하지 않은 한 어머니의 투쟁기가 절묘하게 섞여있어서 영화에 비유한다면 당시의 혼란상을 생생하게 그린 다큐멘터리와 롤러코스터 같은 액션 스릴러가 한 화면에 절반씩 담긴 듯한 특별한 느낌을 줍니다.

 

인종차별 서사의 출발점은 버싱(Busing)입니다. 1974년 보스턴 법원은 인종차별문제의 해소책이라며 각각 백인과 흑인학생으로만 이뤄진 두 공립고등학교에게 상당수의 학생을 맞바꿔 버스(Bus)로 통학시키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강제 전학을 통해 두 인종의 학생들을 섞어놓기만 하면 인종차별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거라는 안이하고도 무책임한 이 판결 때문에 가난한 백인들의 도시 사우디(사우스 보스턴의 애칭)는 대혼란에 빠지고 이내 격분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와중에 42살의 메리 패트는 조만간 버싱으로 인해 흑인학생들과 한 반에서 수업을 듣게 될 17살 딸 줄스 때문에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런데 전날 밤 친구들과 외출한 줄스가 아무 연락도 없이 실종되고, 하필 같은 시간대에 흑인청년 한 명이 기차역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자 메리 패트는 두 사건이 연관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패닉에 빠집니다. 함께 외출했던 딸의 친구들은 물론 사우디를 장악하고 있는 마피아까지 찾아가 줄스의 행방을 묻던 메리 패트는 결국 믿고 싶지 않은 사실과 마주하게 되고, 그때부터 지옥행을 각오한 복수극을 준비합니다. 문제는 딸을 위한 복수극이 곧 흑인청년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버싱으로 인해 흑인들을 향한 혐오감이 극에 달한 사우디의 백인들의 눈에 메리 패트는 흑인을 위해 싸우는 백인여성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자비들은 지금까지 읽은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모두 1차원적으로 보이게 만들 만큼 묵직한 작품입니다. 가난한 백인들의 도시 사우디에서 벌어진 흑인청년 살인사건 미스터리와 한 어머니가 벌이는 무자비한 복수 스릴러를 그리면서도 이분법과는 거리가 먼 다층적인 인종차별 서사를 저변에 깔아놓아서 흔히 선악의 대결로만 포장되곤 했던 유사한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감과 깊이를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인종차별이 단지 흑백 간에 벌어지는 문제만은 아니란 점(가난한 백인 VS 상류층 백인), 또 인종차별에 대한 신념이란 게 실은 그때그때 개인의 처지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인종차별을 이용하여 물질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보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점 등 지금껏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인종차별의 이면을 집요하게 그린 대목들입니다.

 

주인공 메리 패트는 이 대목들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인종차별에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녀는 버싱과 흑인청년의 죽음과 딸 줄스의 실종을 겪는 동안 거듭 자신의 태도를 바꿉니다. 그것은 신념이 약해서도 아니고, 생각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줄스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인종차별에 관한 한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게 메리 패트의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줄스가 정글과도 같은 사우디에서 무탈하게 성장하기를 바랐던 탓에 자기도 모르게 백인의 우월감을 주입했던 일에 대해 메리 패트는 처절할 정도로 자책합니다. 그런 심정에서 총과 무기를 집어 들고 복수에 나서는 그녀를 지켜보는 독자의 마음은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리 패트의 복수극은 조용하지만 잔혹하게 이뤄집니다. 납치, 협박, 폭행, 감금 등 그녀가 해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하지만 그 복수극은 조금도 짜릿하거나 통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수가 거듭될수록 메리 패트의 가슴속에 무거운 누름돌이 연이어 쌓이는 듯 느껴져서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배가될 뿐입니다.

 

작은 자비들은 쉽고 편하게 읽히는 스릴러는 절대 아닙니다. 따로 떼어놓아도 각각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구축할 수 있는 두 개의 서사가 절묘하게 섞여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각각의 서사가 지닌 무게감과 비극성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작인 우리가 추락한 이유에서 다소 아쉬움을 느낀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라면 작은 자비들을 통해 그때의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