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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간의 가족
가와세 나나오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9월
평점 :
무례하고 난폭한 남존여비 추종자 60대 하세베, 겉멋과 탐욕에 찌든 70대 노파 지요코, 속을 알 수 없는 시건방진 16살 소년 리쿠토,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고 희롱한 뒤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20대 여성 나쓰미. 인터넷을 통해 동반자살을 도모한 네 사람은 실행 당일 심야의 깊은 산속에서 뜻밖의 상황에 처합니다. 한 여자가 갓난아기를 유기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한 것입니다. 죽기 위해 모인 자들이 갓난아기를 살려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문제는 SNS에 올라온 영상 하나 때문에 네 사람이 갑자기 유괴범으로 몰렸다는 점입니다. 이어 각자의 개인정보가 무차별로 공개되고 마녀사냥과도 같은 추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네 사람은 아기를 유기한 범인을 직접 찾아내기로 합니다.
꽤 오래 전 부산영화제에서 ‘자살관광버스’라는 일본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동반자살을 모의한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하며 인생의 마지막 즐거움을 누린 뒤 사고로 위장하여 세상을 떠나려 했지만 우여곡절과 반전 끝에 기막힌 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입니다. ‘4일간의 가족’의 등장인물 캐릭터와 대략의 줄거리만 보곤 ‘자살관광버스’ 초반부와 비슷한 유쾌한 스타일의 미스터리 혹은 감동 위주의 휴먼 드라마가 아닐까, 막연히 추측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읽는 내내 한시도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었고, 아기를 구하고 누명을 벗기 위한 네 사람의 분투는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로드무비 스타일 미스터리 스릴러였으며, 그들이 밝혀낸 사건의 진상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눈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 서사 역시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아서 여러 차례 독자의 눈가를 뜨끈하게 만들곤 합니다.
이야기는 ‘자살관광버스’처럼 다소 소란하게 시작됩니다. 동반자살을 위해 모였지만 네 사람은 서로를 공격하고 모욕하고 비난합니다. “그딴 일로 왜 죽어?”라는 훈계까지 늘어놓는 웃지 못 할 장면들이 연출됩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가 살해 목적으로 갓난아기를 유기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이들의 관계는 급반전됩니다. 정의감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잠시 보류하고 ‘갓난아기 구하기’에 뜻을 모은 것입니다.
이 대목까지만 보면 그다지 새롭지도 않고 기대감을 유발하지도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올린 SNS 영상 하나 때문에 졸지에 유괴범이 된 네 사람이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신상이 털리고 흉악한 범죄자로 몰리자 말 그대로 죽을 각오로 ‘갓난아기 유기범 찾기’에 나서면서 이야기는 독자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롤러코스터처럼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경찰에 신고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개인정보가 전부 노출돼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된 데다 손에 쥔 단서라곤 아기를 유기하던 여자의 흐릿한 사진 하나가 전부인 네 사람은 숱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당연히 의견 충돌도 자주 일어나고, 포기하자는 말도 수시로 나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네 사람을 한데 묶는 건 그들이 사부로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갓난아기입니다. 애초 못 본 척 하고 계획대로 세상을 떠났으면 그만이었겠지만, 깊은 산속에 버려졌던 사부로가 자신들의 마음 속 뭔가를 툭 건드린 그 순간부터 네 사람의 인생은 뜻밖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고, 이제 단순히 사부로를 살렸다는 안도감을 넘어 사부로를 죽이려 했던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까지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의지를 품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네 사람은 사부로를 구한다는 목적으로 매 순간 스스로를 치유했다. 지금까지 찾지 못한 다시 살 기회를 탐욕스럽게 잡으려 하는 것이다.” (p273)
고백하자면 읽기도 전에 다소 뻔한 전개가 예상된 나머지 초반부만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접을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4일간의 가족’은 기대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 것은 물론 미스터리 스릴러와 휴먼 드라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제대로 잡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리 새롭지 않은 설정에서 출발했지만 매번 독자의 예상을 깨부수며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뽑아낸 필력도 눈길을 끌었는데, 덕분에 가와세 나나오의 다른 작품도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4일간의 가족’ 외에 한국에 소개된 작품은 ‘이사부로 양복점’이 유일한데, 기회가 된다면 그녀의 전공인 미스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