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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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전쯤 북스피어 인스타그램에 삼송 김사장 님의 장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다름 아닌 활자 잔혹극의 두 번째 복간 소식이었는데(초간은 1996년 고려원의 유니스의 비밀이고, 첫 복간은 2011년 북스피어의 활자 잔혹극입니다), 어찌나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로서 미안함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습니다. 더 미안했던 건 실은 2011년에 출간된 구판을 몇 년 전쯤 중고로 구입한 뒤 책장에 아주 오랫동안 방치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얼른 읽고 서평 올리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곧바로 약속 안 지키면 압수수색 드갑니다.”라는 답글이 올라왔고, 그런 연유로 원래 읽으려던 책을 덮고 부랴부랴 활자 잔혹극을 책장에서 꺼내 읽게 됐습니다. (서평 가운데 인용문과 페이지는 모두 2011년 판 기준입니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5)

 

활자 잔혹극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평을 들은 작품입니다. (출판사가 제공한 카드뉴스에 그 유명한 첫 문장이 공개돼있기에 저도 서평 첫머리에 그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를 곧장 독자에게 알린 셈인데,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라는 다소 황당한 범행동기가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문맹이란 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는 있어도 일가족을 몰살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한 범행동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문맹이란 단지 읽고 쓰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엄청난 시한폭탄임을 깨달았습니다.

 

커버데일 일가는 대저택을 관리하고 집안일을 돌볼 가정부로 40대 중반의 유니스 파치먼을 고용합니다. 잘 웃지도 않는데다 차갑고 섬뜩하기만 한 외양과 달리 유니스는 가정부로서 최고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가족 중 일부는 유니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대저택 생활은 큰 탈 없이 이어집니다. 유니스가 유일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건 활자의 문제. 대저택 곳곳에 꽂혀있는 엄청난 양의 책은 그 자체로 공포입니다. 메모나 편지를 통해 일을 지시받는 것도 극도로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가까스로 위기의 순간들을 모면하며 9개월을 보낸 어느 날, 유니스는 더 이상 문맹을 감출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그녀는 활자로 도배된 세상이 끔찍했다. 활자를 자신에게 닥친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활자는 거리를 두고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녀에게 활자를 보여주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략)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p61)

 

유니스는 명백한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무 죄책감 없이 협박과 공갈을 일삼아왔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적도 있으며, 공감 능력은 물론 감정이나 상상력 자체가 결여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이코패스 기질은 타고난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즉 문맹으로 인해 촉발되고 강화된 것입니다. 문맹임을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은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켜버렸고, 단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차원을 넘어 도덕적 문맹상태로 만들었습니다. 활자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이나 보편적 도덕마저 읽어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유니스가 유일하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가구나 장식품 등의 사물뿐입니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가 유니스에겐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상태입니다. 유니스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살짝 맛이 간 여성 조앤 스미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연 이유는 그녀가 활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니스에게 누군가 책이나 메모를 들이대며 너 문맹이지?”라고 지적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붕괴될 수밖에 없고, 그 어떤 폭주라도 가능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량도 짧고 이야기 구조도 단선적이지만 거의 50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영국 작가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의 참맛을 만끽하느라 한 줄 한 줄 공들여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는 첫 문장이 수시로 떠오르며 소름을 돋게 만들곤 해서 좀처럼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니스 파치먼의 이야기는 요즘처럼 연일 뜨거운 날이 계속 될 때 의외의 서늘함을 제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활자 잔혹극이라는 잘 만들어진 번역 제목에 눈길이 끌린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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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는 천국에 있다
고조 노리오 지음, 박재영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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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목이 베어져 살해된 여섯 명의 남녀가 바닷가 대저택에 모입니다. 그곳은 현세에서 일명 천국 저택으로 불리던 곳으로 여섯 명이 참혹하게 살해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살해될 당시의 상황만 기억할 뿐 자신의 이름이나 직업조차 잊어버린 여섯 남녀는 왜 자신들이 이곳에 모인 건지, 자신들을 살해한 범인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추리를 벌입니다. 또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야만 이 천국을 떠나 제대로 성불할 수 있다고 믿으며 협력합니다. 다만 자신들 가운데 한 명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기에 저택은 늘 미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합니다.

 

이른바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동일범에게 살해된 여섯 명의 영혼이 기이하게도 범행이 벌어진 바로 그 저택에 모여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미스터리인데, 말하자면 영혼 판타지와 본격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셈입니다. 현세에서 천국 저택으로 불리던 그곳은 죽은 자들이 모인 곳이란 점에서 진짜 천국이기도 한데, 그런 탓에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살해당한 이유도, 자신을 살해한 자도 모르는 영혼들이 범인을 밝히고 진상을 추적한다고 하면 당연히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연상되지만, 이 작품은 대체로 화기애애(?)하고 때론 코믹하기까지 한 뜻밖의 분위기를 발산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름과 직업은 물론 살해당한 이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가운데 한 사람이 범인이지만, 다들 기억이 휘발된 탓에 무턱대고 의심을 품기보다는 어정쩡한 협력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시간들이 몇 날에 걸쳐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친분과 우정이 싹트다 보니 어느 시점엔 딱히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특별히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 같다는, 아주 묘한 공동체 의식까지 생겨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누군가는 진상 규명을 포기하고 이대로 사건을 잊는다면 여섯 명이서 영원히 함께 놀 수 있어요.”라는 제안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판타지 설정 속에서 본격 미스터리를 이끌어가는 건 명탐정 역할을 맡은 입니다.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아침마다 저택에 배달되는 신문을 통해 현세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의 정보를 손에 넣은 는 끊임없는 추리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자신만만한 태도로 매번 다른 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가 번번이 반론에 고개를 숙이곤 하지만 그는 명탐정 역할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추리를 통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해법을 찾아내는데, 그 대목부터 연이은 반전이 터지면서 클라이맥스에 진입하게 됩니다.

 

일부 작품 때문에 특수설정 미스터리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살인자는 천국에 있다는 판타지와 본격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작품이라 마지막 장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음울한 설정과 달리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한 점도 좋았고, 복잡하지 않게 잘 짜인 판타지의 규칙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데뷔한 고조 노리오가 일본에서 다른 작품도 내놓았다고 하는데, 한국에 출간된다면 꼭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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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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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평범한 직장인 나가미네 시게키의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보물처럼 키워온 딸 에마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정체불명의 남자에게서 범인들의 이름과 거처를 들은 나가미네는 그곳에서 에마가 끔찍하게 성폭행당한 뒤 살해당하는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발견합니다. 오열하던 나가미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마주친 범인 한 명을 죽인 뒤 남은 한 명을 찾아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즉각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지지만 나가미네의 집념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막연한 단서만 갖고 있을 뿐인 나가미네의 복수의 여정은 시간이 갈수록 그를 더욱 큰 절망에 빠뜨립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 미스터리 입문 직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와 처음 만났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촉법소년, 소년법, 사적 복수의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지금도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을 읽을 때마다 매번 방황하는 칼날을 떠올리곤 합니다. 딸의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진 주인공 나가미네가 마지막에 어떤 엔딩을 맞이했는지는 잊었지만, 살해당하는 딸의 모습을 비디오로 보며 오열하던 그의 참담한 모습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갱생을 더 중요시 여기는 부당한 소년법 체계는 나가미네로 하여금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입니다. 계획살인이 아닌 이상 범인들은 3년이면 사회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이 터무니없는 상황은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되고 2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며, 그래선지 아직도 일본에서는 촉법소년과 소년법에 대한 미스터리가 적잖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런 점에서 방황하는 칼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게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과연 그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로 을 차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p508~509)

 

히가시노 게이고는 촉법소년과 소년법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사적 복수에 관해선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딸의 복수를 위해 인생 전부를 내던진 나가미네의 분노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복수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여러 조연들을 통해 거듭 밝히곤 합니다. 독자 역시 한편으론 나가미네의 복수가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그 복수가 끝났을 때 과연 그에게 무엇이 남을까, 라는 안타까운 자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가미네 역시 당연히 그 자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사적 복수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 결국 자신의 인생마저 망쳐버린다는 점, 성공해도 허무함밖에 남지 않는다는 점은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바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처절함이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몰아붙입니다.

 

나가미네의 복수의 여정과 경찰의 추적극이라는 구도에 비해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이 살짝 과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가미네의 복수극에 휘말린 여러 조연들을 정교한 설계도 위에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마지막 장까지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즉 무겁고 어두운 주제지만 재미라는 또 하나의 미덕도 놓치지 않습니다.

성공해도 기쁠 것 같지 않고, 실패해도 다행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것 같은 나가미네의 복수는 예상 밖의 엔딩을 맞이합니다. 엄청난 반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여운을 음미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엔딩이라고 할까요?

 

고백하자면 전 갱생론따위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엄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솜방망이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적 복수를 응원하지만 그것이 횡행하는 사회도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그야말로 일관성 없는 이상한 신념인 셈인데, 이 모든 문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문제제기를 건네는 방황하는 칼날을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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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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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3주를 앞두고 연인 안나가 종적을 감추자 라파엘은 패닉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안나가 사라지기 직전 세 구의 참혹한 시신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고백한 탓에 라파엘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사는 퇴직형사 마르크와 함께 안나를 찾아나선 라파엘은 얼마 안 가 안나가 오랫동안 신분을 바꿔 살아온 사실, 11년 전 벌어졌던 일명 하이츠 키퍼 사건’, 10대 소녀들을 감금하고 폭행했던 사건에 안나가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나를 찾으려면 그녀의 과거를 파헤쳐야 한다고 확신한 라파엘은 파리에서의 조사를 마르크에게 맡긴 뒤 안나가 태어나고 자란 뉴욕으로 향합니다.

 

기욤 뮈소의 작품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브루클린의 소녀는 거침없는 속도감과 빠른 국면 전환에 관한 한 가장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안나를 찾기 위한 라파엘과 마르크의 조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녀에 관한 뜻밖의 정보들 때문에 엄청난 속도와 굴곡을 지닌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됩니다. 마치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과속방지턱에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과속과 역주행을 거듭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라파엘과 마르크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안나가 자발적으로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납치된 게 분명하다는 점, 그리고 그 누군가는 라파엘과 마르크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사건 관련자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의 조사는 단순한 실종된 연인 찾기가 아니라 악취와 악의가 진동하는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까지 확장됩니다.

안나의 과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라파엘과 마르크는 11년 전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왔다가 하이츠 키퍼 사건에 연루된 클레어 칼라일이란 소녀가 안나의 실체임을 확신합니다. 마르크가 파리에 남아 하이츠 키퍼 사건을 파헤치는 동안 라파엘은 뉴욕으로 날아가 클레어 칼라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뜻밖에도 같은 시기 그곳에서도 의문의 죽음이 있었던 걸 알게 되곤 이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에 엮여있음을 깨닫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밝혀질 때마다 거기에 연루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조사해야 할 사건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복잡하게 얽혀있고, 무대마저 파리와 뉴욕으로 양분되다 보니 독자 입장에선 빛의 속도로 책장을 넘기는 와중에도 넘쳐나는 새 정보와 인물들을 머릿속에 담느라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정보와 인물들 속에 안나의 행방은 물론 과거의 진실을 가리키는 작은 조각들이 숨어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얼른 책장을 넘기고 싶으면서도, 뭔가 놓친 게 없을까 싶어 다급한 마음으로 활자들을 노려봐야 하는 고도의 몰입감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과거와 현재, 파리와 뉴욕이라는 시공간 속에 배치된 여러 사건들은 대반전과 함께 해소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이 운명처럼 얽힌 끝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이 벌어진 셈인데, 그 모든 우연과 필연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탐문과 추리를 벌인 라파엘과 마르크의 여정은 우여곡절과 반전과 충격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막판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기욤 뮈소는 마지막까지 뜻밖의 반전을 남겨놓아서 독자로 하여금 책을 덮을 때까지 조금도 안심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가끔씩 마주치곤 했던 장황한 사족들입니다. 딱히 어느 대목이라고 지목하긴 어렵지만, 인물이나 배경을 소개할 때라든지, 사건과 상황을 묘사할 때라든지 한두 줄이면 충분할 것을 한두 페이지에 걸쳐 지루하게 묘사한 경우가 종종 목격되곤 했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땐 건너뛰고 싶기도 했는데, 물론 마음만 그랬고 결국 한 줄도 건너뛰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조급함이 과도해진 나머지 멀쩡한(?) 대목을 사족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만점에서 별 1개를 빼게 할 정도로 아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기욤 뮈소는 읽은 작품보다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은 작가인데, ‘브루클린의 소녀를 읽고 나니 우선 스릴러 서사에 충실한 작품부터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가씨와 밤처럼 재미있게 읽은 작품도 있지만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처럼 실망이 더 컸던 작품도 있어서 다른 독자들의 평을 살펴가며 목록을 만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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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사라지던 밤 1 나비사냥 3
박영광 지음 / 매드픽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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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하태석 형사는 12살 소녀들을 납치 살해한 것이 확실한 김동수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독직폭행을 저질러 중징계를 받고 지방으로 좌천됐습니다. 물증도 없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자 김동수는 유유히 법망을 벗어났고 사건은 여전히 미제상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김동수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납치된 소녀들의 가족이 범인이란 걸 알게 되자 하태석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서울경찰청 미제사건전담팀에 지원한 하태석은 김동수 사건의 전말은 물론 7년째 미제상태인 소녀들 납치사건을 다시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7년 전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손이 하태석의 수사를 방해합니다. 소녀들 사건의 재수사를 위해선 죽은 김동수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지만 하태석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발목을 잡히곤 합니다.

 

나비사냥’(2013), ‘시그니처’(2017)에 이은 나비사냥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소녀가 사라지던 밤은 시리즈 첫 편에서 하태석 형사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김동수 사건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소녀들의 가족이 김동수를 살해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7년 전 두 소녀를 납치 살해한 것이 분명한 김동수의 범행을 입증하는 것, 그리고 메인 스토리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결국 한줄기 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이는 경기-인천 일대 연쇄실종사건이 막간극처럼 끼어듭니다.

하태석과 미제사건전담팀의 1차 미션은 소녀들 사건이지만, 죽은 김동수에 대한 조사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경찰 상층부는 김동수 사건을 서둘러 종결하려고만 할뿐 하태석의 조사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7년 전처럼 갖은 핑계를 대가며 하태석의 행보를 방해할 뿐입니다. 결국 조직 내부로 시선을 돌린 하태석은 경찰을 그만둘 각오까지 다지며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현직 형사만이 풀어낼 수 있는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경찰조직 내부의 문제, 현장을 뛰는 형사들의 애환, 서무와 관제 등 빛나진 않지만 꼭 필요한 경찰 업무 등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디테일이 곳곳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또 대형로펌의 변호사, 법최면 전문가, 범죄피해자 가족모임 등 범죄와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서사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아마 한국에서 출간된 경찰 미스터리 가운데 나비사냥 시리즈만한 리얼리티와 볼륨감을 갖춘 작품을 찾아보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스릴러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면 하나쯤 갖고 있는 죄책감 가득한 트라우마이자 반드시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지막 무대이자 총결산편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이번 작품에서 김동수의 범행을 입증하고 소녀들의 유해라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태석에게 과연 얼마나 잔혹한 시련들이 닥칠지 읽기 전부터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그 걱정의 몇 배나 되는 고난들이 하태석과 미제사건전담팀을 위기에 빠뜨리곤 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전작들에 비해 군더더기와 사족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주고받는 대화는 불필요할 정도로 길게 늘어지고, 스토리와 무관한 대목에도 적잖은 분량이 할애됩니다. 동일한 정보가 거듭 설명되기도 하고, 꼭 필요한 정보도 지나칠 정도로 여러 겹으로 포장돼 설명됩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하태석에게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온 대목, 그러니까 클라이맥스로 진입하는 곳에서부터 이 군더더기와 사족이 더욱 많아진 점인데, 정작 몰입도가 가장 높아야 할 지점에서부터 거의 스킵하듯 책장을 넘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작가가 온 힘을 다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 도가 지나친 나머지 거꾸로 독자의 진을 뺀 느낌입니다.

한 가지만 더 부연하자면, 잔혹한 스릴러를 어지간히 많이 읽기도 했고 또 그런 작품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소녀가 사라지던 밤의 마지막 부분은 도저히 읽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해서 결정적인 몇 페이지는 건너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 때문에 책을 다 읽고도 여운은커녕 지독한 씁쓸함만 남았는데, 그래선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과잉으로 여겨진 게 사실입니다.

 

엔딩만 보면 나비사냥 시리즈는 이 작품으로 마무리될 것 같은데, 언젠가 하태석의 이야기가 또다시 독자를 찾아올지는 작가 외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하태석의 복귀는 언제라도 환영하겠지만 군더더기와 사족과 견딜 수 없는 참혹함만큼은 충분히 덜어내진 상태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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