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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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평범한 직장인 나가미네 시게키의 세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보물처럼 키워온 딸 에마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정체불명의 남자에게서 범인들의 이름과 거처를 들은 나가미네는 그곳에서 에마가 끔찍하게 성폭행당한 뒤 살해당하는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발견합니다. 오열하던 나가미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마주친 범인 한 명을 죽인 뒤 남은 한 명을 찾아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즉각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지지만 나가미네의 집념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막연한 단서만 갖고 있을 뿐인 나가미네의 복수의 여정은 시간이 갈수록 그를 더욱 큰 절망에 빠뜨립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 미스터리 입문 직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와 처음 만났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촉법소년, 소년법, 사적 복수의 문제에 대해 처음 알게 해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지금도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을 읽을 때마다 매번 방황하는 칼날을 떠올리곤 합니다. 딸의 복수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진 주인공 나가미네가 마지막에 어떤 엔딩을 맞이했는지는 잊었지만, 살해당하는 딸의 모습을 비디오로 보며 오열하던 그의 참담한 모습만큼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피해자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갱생을 더 중요시 여기는 부당한 소년법 체계는 나가미네로 하여금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입니다. 계획살인이 아닌 이상 범인들은 3년이면 사회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이 터무니없는 상황은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되고 2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며, 그래선지 아직도 일본에서는 촉법소년과 소년법에 대한 미스터리가 적잖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런 점에서 방황하는 칼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게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까? 과연 그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로 을 차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p508~509)

 

히가시노 게이고는 촉법소년과 소년법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사적 복수에 관해선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딸의 복수를 위해 인생 전부를 내던진 나가미네의 분노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복수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여러 조연들을 통해 거듭 밝히곤 합니다. 독자 역시 한편으론 나가미네의 복수가 성공하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그 복수가 끝났을 때 과연 그에게 무엇이 남을까, 라는 안타까운 자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가미네 역시 당연히 그 자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사적 복수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점, 결국 자신의 인생마저 망쳐버린다는 점, 성공해도 허무함밖에 남지 않는다는 점은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바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처절함이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몰아붙입니다.

 

나가미네의 복수의 여정과 경찰의 추적극이라는 구도에 비해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이 살짝 과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가미네의 복수극에 휘말린 여러 조연들을 정교한 설계도 위에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마지막 장까지 조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즉 무겁고 어두운 주제지만 재미라는 또 하나의 미덕도 놓치지 않습니다.

성공해도 기쁠 것 같지 않고, 실패해도 다행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것 같은 나가미네의 복수는 예상 밖의 엔딩을 맞이합니다. 엄청난 반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여운을 음미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엔딩이라고 할까요?

 

고백하자면 전 갱생론따위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엄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솜방망이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적 복수를 응원하지만 그것이 횡행하는 사회도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그야말로 일관성 없는 이상한 신념인 셈인데, 이 모든 문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문제제기를 건네는 방황하는 칼날을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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