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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죽인다
손선영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18년 4월
평점 :
택시기사로 일하던 손창환은 오래 전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박상준을 손님으로 태웁니다.
손창환은 박상준을 죽이겠다는 일념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
어느 날 박상준의 딸이 자신을 납치해달라며 다가오면서 그의 계획은 엉망으로 꼬입니다.
하지만 손창환은 이 어이없는 자작 납치극 이면에 놓인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됩니다.
“내가 먼저 죽이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는 오히려 또다시 인생이 망가질 위기에 봉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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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출간된 ‘이웃집 두 남자가 수상하다’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손선영의 작품입니다.
유머가 섞인 일상 미스터리로 처음 만났던 작가라
복수와 납치 등 꽤 센 설정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죽이려는 남자의 딸이 자신을 납치해달라며 매달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협박 방법과 요구액까지 하나하나 코치를 하며 납치극을 이끌자 손창환은 당황합니다.
복수의 주인공에서 갑자기 납치극의 조연으로 강등된 느낌 때문이죠.
이러다가 복수는커녕 지은 죄도 없이 납치범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갈등에 빠지지만,
손창환은 내내 남자의 딸과 동행하며 수십억의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전념합니다.
그러다가 이 자작 납치극의 진짜 정체에 대해 깨닫곤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는 줄거리인데...
일단 흥미롭게 읽히는 이야기입니다.
독자는 자작 납치극을 지켜보면서 내내 강한 위화감을 느끼게 되고
(프롤로그를 생각해보면) 분명 이 납치극 이면에 진짜 이야기가 있을 거란 점 때문에
언제 어디쯤에서 그 단서가 노출될지 무척 궁금해지게 됩니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그 단서가 희미하게나마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사실 클라이맥스에 가서 거의 한꺼번에 폭죽처럼 터집니다.
프롤로그의 청부업자도, 뜬금없이 등장했던 킬러들도 그 대목에서 존재감을 나타내고,
납치극의 조연으로 전락(?)했던 손창환의 진짜배기 복수 역시 막판에 진면목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통해 복수하려는 대상이
그다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손창환의 인생을 망가뜨린 박상준은 야비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입니다.
손창환 입장에서만 보자면 열 번을 죽여도 시원찮을 대상이지만,
객관적인 독자의 시선에서는 이 세상에 너무 흔해빠진 평범한 악당에 불과합니다.
또, 너무 복잡다단한 구성 때문에 스토리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1990년대부터 2017년에 이르는 20여년의 다양한 시기가 랜덤하게 뒤죽박죽 등장하고,
어떻게 주인공과 연결될지 짐작하기 힘든 인물과 해프닝이 각 시기마다 툭툭 튀어나옵니다.
손창환의 복수심을 강조하기 위한 과거 시점의 챕터들은 그리 강렬하지 않았고,
갑작스런 청부업자, 킬러의 등장은 오히려 현재 시점의 납치극을 소품으로 격하시켰습니다.
덕분에 클라이맥스는 ‘굳이 저렇게 복수할만한 사연이었나?’라는 의문과 함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이 이 작품에 어울리나?’라는 작위적인 느낌을 함께 던져줬습니다.
마지막으로, 악당이 꾸민 ‘진짜 범죄’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현실성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언급은 할 수 없지만
기획, 설계, 실행, 복선 등 대부분의 요소에서 ‘과연 저럴 수 있을까?’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가 스스로 애착을 가진 이야기라는 점을 후기에서 밝혔지만,
여러 지점에서 현실감이 부족했던 탓에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매력을 충분히 입증했던 작가인 만큼
후속작에서는 좀더 현실감이 살아있는 멋진 장르물을 구현하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