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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갱
반시연 지음 / 인디페이퍼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무저갱 = 바닥이 없는 깊은 구덩이로, 지하 세계나 지옥 따위로 연결되는 곳.”
어감 자체도 꽤나 음울한 분위기를 발산하는데 그 의미는 한결 더 심각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제목으로 삼은 작가는 독자의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그러니까 ‘지옥 따위로 연결되는 곳’이 아니라 ‘지옥 그 자체’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세 명의 ‘나’가 등장합니다.
밑바닥을 전전하며 소심하게 살아오던 ‘나’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곤
자신 안에 내재돼있던 소시오패스의 기질을 발견한 뒤 잔혹한 살인마로 진화합니다.
소시오패스들이 모여 만든 ‘회사’의 중간간부인 ‘나’는
의뢰인들이 지목한 자들을 길고 긴 시간동안 잔혹하게 고문한 뒤 쓰레기처럼 처리합니다.
전직 의사인 ‘나’는 약물과 가스를 이용하여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앞선 두 명의 ‘나’는 명백히 소시오패스라 칭할 수 있는 자들인데,
이들이 먹잇감을 선택하고 처리하는 방식은 ‘정의로운 사적 복수’에 입각한다는 점입니다.
내재된 소시오패스 기질을 발견한 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감을 얻은 ‘나’는
자기 주위의 사악한 자들을 차례차례 응징해나갑니다.
그럴 때마다 엔돌핀의 폭발과 함께 삶의 희열을 만끽하던 ‘나’는
자신에게 부여된 난이도 높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건 한판을 준비합니다.
두 번째 ‘나’는 범죄 피해자들의 의뢰를 받아 가해자들을 응징하는 회사의 ‘차장님’인데,
그는 늘 하얀 가면을 쓴 채 먹잇감들의 뼈와 살을 가뿐하게(?) 발라내곤 합니다.
즉, 그의 타겟 역시 모두 악인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 명의 ‘나’는 각각 ‘싸움꾼’, ‘사냥꾼’, ‘파수꾼’이란 이름으로 한 챕터씩 화자를 맡다가
막판에 이르러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이야기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정의를 구현하는 소시오패스’는 어쩌면 사적 복수에 관한 한 최고의 설정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조사부, 현장부, 처리부 등으로 분업화된 소시오패스 회사 소속의 유능한 차장님은
사적 복수를 즐겨 읽는 저로서는 판타지에 가까울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습니다.
다만, 이 작품이 사적 복수 자체를 주제로 한 작품은 아니라는 점,
그래서 “제대로 된 형벌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를 지킬 수 있는가?”라는 홍보카피가
이 작품의 메인스토리나 주제 자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 점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취향만 놓고 보면 별 5개도 부족한 작품이긴 하지만,
0.5개를 뺀 이유는 서사나 스토리의 힘보다는 폭력 그 자체에만 너무 몰두했다는 점,
꽤 놀랍기는 해도 막판 반전이 다소 설명이 부족했고 작위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무저갱’이라는 제목이 주제를 반영하기보다는 겉멋처럼 보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왜?’라는 점에 대해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설정이 부족했다고 할까요?
물론 이 작품에서 ‘왜?’라든가 ‘주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여운 같은 건 남지 않았고, 단지 피비린내만 진동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갈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저 역시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 읽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족으로...
일단, 잔혹한 폭력 묘사에 조금이라도 거부감이 있는 독자는 이 작품을 피해야 합니다.
영화 ‘올드보이’의 가장 잔인한 장면들만으로 400여 페이지가 꽉 차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지간해선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저도 일부 장면에서는 꽤나 심기가 불편할 정도였는데,
그게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긴 해도 때론 과도하게 느껴진 것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