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
윤재성 지음 / 새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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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형진은 늦은 밤 집 앞에서 수상한 사내와 마주친다.

사내는 갑자기 형진에게 불을 뿜고, 형진 가족이 살던 원룸 건물까지 송두리째 태워버린다.

흉측한 몰골이 된 채 가까스로 살아남은 형진은 경찰과 언론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누구 하나 입에서 불을 뿜는방화범의 존재를 믿어주지 않는다.

결국 형진은 화상을 입은 몸으로 노숙 생활을 전전하며 홀로 범인을 뒤쫓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진실 찾기를 돕겠다는 기자 김정혜와 함께

정체불명의 방화범은 물론 악랄한 모방범을 잡기 위한 사투에 돌입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방화범을 소재로 한 스릴러 작품입니다.

멀쩡한 청년이 졸지에 방화로 인해 집과 동생을 잃고 괴물 같은 화상 자국만 얻게 됐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을 찾기 위해 홀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끝에

8년 만에 진범의 단서를 잡아내곤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형진은 방화사건 이후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갑니다.

애초 주민의 실화로 판정된데다 경찰과 언론 모두 자신의 진술을 허황된 거짓으로만 여기자

형진은 스스로 소방관이 되어 방화범을 찾을 생각도 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곤 합니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만 몰아세우는 세상에 대해 증오심을 키우던 형진은

스스로 방화범이 되어 세상에게 복수하고픈 유혹을 강렬히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형진에게 협업을 제안한 건 한때 잘 나갔던 기자 김정혜입니다.

형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특종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고,

그건 곧 바닥까지 추락한 기자로서의 위상을 복구시켜줄 무기가 될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형진에겐 상대해야 할 두 명의 악당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박살낸 방화범이고, 또 하나는 방화범 못잖게 끔직한 모방범입니다.

방화범이 일련의 목표물을 설정하고 완벽한 준비를 통해 참사를 일으킨다면,

모방범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불쇼를 벌이고 다닙니다.

그 외에 형진과 동고동락했던 노숙자들과 형진의 형 형문이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형문은 철든 이후 단 한 번도 형진을 사람 취급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방화사건 이후 거의 의절한 채 홀로 법조인으로 성공의 길을 간 인물입니다.

그런 형문에게 괴물 같은 형상을 한데다 방화범으로까지 몰린 동생 형진은

말 그대로 호적에서 파내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은존재입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주인공이 조력자들과 함께 갖은 고난 끝에 악당을 응징한다는 설정은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힘이 있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물이든 사건이든 반전이든 뭔가 한 가지 신선한 설정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독자의 흥미나 만족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오직 하나, ‘개연성의 부족때문입니다.

, ‘그럴 듯 해보여야 하는 대목들에서 전혀 혹은 다소 그럴 듯 해보이지 않았다는 얘긴데,

이 작품에는 가장 중요한 변곡점마다 ?’라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의 허술함이 엿보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몇 가지만 두루뭉술하게라도 뽑아보면...

철근까지 녹일 정도의 특별한 물질을 사용한 방화의 흔적이 있을 텐데

왜 경찰과 소방당국은 형진이 살던 원룸 건물의 화재를 주민의 실화로 단정했을까?

왜 모 방송사는 누구도 믿지 않는 형진을 소재로 개국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까?

아무리 특종이 간절해도 왜 정혜는 아무도 믿지 않는 형진을 특종의 계기로 선택했을까?

방화사건을 이용하여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서울시장 자리를 노리겠다는 정치인 설정은

과연 2019년이라는 시점에 어느 정도의 현실감이 있는가?

형진과 동고동락했던 노숙자들과 형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잘 나가는 로펌변호사 형이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준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모습은 과연 개연성이나 현실감이 있나?

 

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간된 작품이라고 출판사도 소개하고 있고,

한국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 때문에 가능하면 격려의 서평을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허술한 지점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 더 약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문장 하나하나의 디테일은 힘도 있고 매력도 있지만,

보다 거시적인 부분, 즉 이야기의 설계 과정에서 좀더 현실감을 고민해야 될 것 같고,

특히 스릴러라면 인물과 사건 모두 도구적으로, 작위적으로 설정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소위 글빨이 느껴지는 작가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계개연성만 탄탄해진다면 얼마든지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데,

작가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서평을 통해 좀더 강하게 단련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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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열대어 케이스릴러
김나영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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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인 한태현과 그의 아내 이서린은 2년 전 추락사고로 현재 코마 상태.

그 중 이서린이 기적적으로 깨어나지만 최근 4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경찰로부터 남편이 연쇄살인 용의자라는 말을 들은 서린은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시동생이자 오랜 친구인 정호의 도움으로 퇴원한 뒤 남편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와 달리 남편에겐 또 다른 모습이 있었고 이에 서린은 충격을 받는다.

그 무렵, 2년 전 연쇄살인과 똑같은 수법의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부랴부랴 재수사에 나서고,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서린 앞에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 ● ●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꽤 여러 겹의 이야기가 층층이 쌓여 있는 작품입니다.

코마상태에 빠져 있는 남편의 진실을 찾아가는 아내,

10여 년 전의 끔찍한 기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복수의 순간만 기다리는 한 여자,

타고난 기질과 습득된 잔혹함으로 중무장한 사이코패스,

죄책감과 분노와 약물에 찌든 통제 불능의 조현병 환자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한꺼번에 전개됩니다.

 

어쩌면 다들 평범하고 무해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인물들이지만

누군가는 추악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서 스스로 괴물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타고난 기질에 더해 후천적인 학습에 의해 괴물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하필 자신을 찾아온 운명 같은 저주 때문에 본의 아니게 괴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 누군가는 그 괴물들로 인해 인생의 경로가 엉망진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한 남자 때문에

끔찍한 괴물들이 들끓는 세상으로 끌려들어간 이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찾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 10여 년 전의 끔찍한 사건이 곁들여지면서 이야기는 제법 풍성해집니다.

무관한 듯 보였던 인물들이 운명처럼 한자리에 모이게 되고,

2년 만에 동일한 방식의 새로운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파국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서울 외곽의 신흥도시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은

우연과 운명이 직조해낸 끔찍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밝혀집니다.

 

일단 이야기도 독하고 캐릭터도 워낙 강렬해서 잘 읽히는 작품입니다.

여러 겹의 사건과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혼란스럽지 않게 잘 설계돼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몇 대목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너무 급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

다소 무리하거나 개연성 없는 상황을 만든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가령, 2년 만에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상태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서린을 찾아온 형사는

(독자에게 정보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짜고짜 서린을 취조하듯 몰아붙입니다.

, 아직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남편의 동생인 정호는 (서린이 진실찾기에 나서게 하기 위해)

아직 근육에 힘도 붙지 않았고 영양상태도 양호하지 않은 서린을 급하게 퇴원시킵니다.

그래놓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희주를 투입하기 위해) 자신의 여친 희주에게

시동생과 서로 이름을 부르는 묘한 사이인 형수 서린의 간호를 부탁합니다.

, 자해와 폭력성이 위험한 수준인 조현병 환자가 가족의 요청으로 손쉽게 퇴원하는가 하면,

특별한 역할도 없는 형사에겐 무슨 이유에선지 가슴 아픈 가족사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인물들을 빨리 한자리에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체로 상식적이지 못해 보였고,

일부 인물들은 어떻게든 극단적으로, 독하고 세게, 그래서 독자의 관심을 끌도록 그리기 위해

다소 이입하기 어려운 비현실적 캐릭터로 만들어졌습니다.

복수, 기억상실, 연쇄살인, 소시오패스 등 잔혹한 코드들이 독자에게 현실감을 획득하려면

사건이나 상황이나 캐릭터가 정말 그럴 듯 해보여야 하는데,

작가의 욕심(?)이 과해서였는지 몇몇 대목에서 허술하거나 극단적인 설정이 눈에 띄었고

그 덕분에 수시로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던 건 무척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 있는 한국 장르물 신인작가와의 만남은 무척 반가웠고,

다음 작품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포장보다는 현실감과 서사의 깊이에 더 방점을 찍은,

그래서 단단하고 내실 있는 이야기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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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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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사이인 남녀가 모텔에 체크인했다.

얼마 후, 여자는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 숨을 못 쉰다며 119 신고를 요청한다.

남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죽었고, 여자에게 거액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검찰은 계획적인 보험 살인으로 보고 사형을 구형했다.

사건 정황과 법의학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부장판사 현민우는 여자의 범행을 확신하지만,

좌우 배석판사들은 합의과정에서 그와는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이렇게 반박한다.

그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을 거친 판결이냐?”...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소위 국민들의 법 감정이란 말을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은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이 선고됐을 때나

명백히 유죄라고 생각했던 피고인에 대해 무죄 또는 집행유예 등의 판결이 나올 때면

일반인들은 도대체 판사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판결을 내렸을까?”라며 공분하고,

언론은 국민들의 법 감정과 거리가 먼 판결입니다.”라는 코멘트를 달곤 합니다.

 

이런 판결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입니다.

요점은 피고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인데

말하자면 거의 100%에 가까운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판사는 이 원칙에 대해 서로 상이한 입장을 견지합니다.

주인공인 부장판사 현민우는 설령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더라도

정황과 추론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면 충분히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배석판사 정남희는 피고가 명백히 범인으로 보이긴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고,

또 다른 배석판사 민지욱은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피고는 무죄일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있는 사건만 존재한다면 판사는 참 편한 직업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은 판사라면 절대 맡고 싶지 않은 골칫덩어리입니다.

사건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모텔방에서 벌어졌고,

애초 사고로 여겨졌기 때문에 부검 없이 시신이 화장된 뒤였고,

시간도 많이 흘러서 관련자들이나 의사들조차 명확한 기억이 없는데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몸에 살인의 흔적이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 때문에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해 혼란을 겪던 부장판사 현민우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보인 모습이나 피해자 가족의 진술 등 정서적인 면에 더 끌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배석판사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사실, 판사는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없는 이런 사건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죠.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뇌를 덜어주기 위해 소위 몇 가지 원칙이란 게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가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경우에 따라 판사에게는 곤란함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회피의 도구로,

흉악범에게는 극적인 면죄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물론 거꾸로 무고한 피고인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도구이기도 하죠.

결국 이 원칙을 누가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인 판사의 역할은 그만큼 막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주제 때문에 이 작품은 피고는 유죄? 무죄?”, “진범은 따로 있나?” 등의 미스터리 대신

오히려 판사에 가까울 정도로 판사들의 고뇌와 다양한 모습들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도진기의 극적인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놀라운 반전들 덕분에 무척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조금은 불친절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엔딩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는데,

젤리 살인사건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겪은 부장판사 현민우가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재판에서 보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마지막에 그가 받은 편지 속 사연(스포일러라 이 정도만^^)은 다소 억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가 아닌 현실감 있는 판사의 이야기는 색다른 맛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도진기의 매력은 역시 꼴통(?) 캐릭터와 독한 미스터리의 조합인 게 분명합니다.

꽤 오래 소식이 없는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를 올해는 꼭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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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김나연 지음 / 문학테라피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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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본인 말대로 반쯤은 에세이로, 반쯤은 소설로 읽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픽션이 아니라 직접 겪은 일들을 글로 표현했으니 에세이임에 분명하지만,

다분히 극적인데다 픽션 못잖은 굴곡과 감정을 지녔으니 소설이라 해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에세이라고 하면 그동안 질릴 정도로 자주 들어온 힐링이란 단어가 즉각 떠오르겠지만

이 작품은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독자를 향한 근거 없고 무책임한 가식적 위로와 달리

유년기부터 30대까지 롤러코스터처럼 살아온 한 사람의 희로애락에 대한 고백을 통해

때론 공감을, 때론 웃음을, 때론 , 왜 이래?’라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마치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야릇함을 선사함으로써

착하고 예쁘기만 한 힐링 에세이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쾌감(?)을 만끽하게 합니다.

 

세 개로 나뉜 챕터의 주제는 각각 가족, 연애, 그리고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후기에 따르면, 이 주제들은 작가를 그렇게 서럽게 만든원인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개의 주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날 서럽게 만든 것들이라고 지목할만한,

그러니까 무척이나 보편적인 개념들입니다.

내게 너무 가까이 존재하지만 때론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 힘든 가족,

행동, 표정, 말 한마디의 미세한 변화만으로도 절정과 파국으로 갈리는 연애의 속성,

그리고 굳이 설명 안 해도 내 인생 최고의 애증의 대상인 자기 자신...

 

일기장이든 블로그든 자신의 감정과 일상을 글로 남겨놓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누구나 가장 많이 활용할 주제들이지만,

그렇다 해도 일기장에조차 솔직해지지 못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가족, 연애, 자신에 대한 소회를 도발적이라 할 정도로 민낯 그대로 드러낸 작가의 고백은

(그것이 공감이든 못마땅함이든 간에) 타인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일기장이나 싸이월드에 갖가지 감정을 쏟아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저 역시 작가처럼 우울할 때 쓴 글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꺼내 읽어보면 문장과 단어는 너무 투박하거나 유치하거나 날것처럼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문장과 단어들을 자기검열하기 시작했고

명목은 정제와 세련이었지만 결과적으론 남의 이야기처럼 밋밋해진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욕설과 민망한 표현과 돌직구 같은 고백들로 채워진 이 작품을 보면서

오래 전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솔직했던 일기장이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특히 세대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로 읽힐 것 같은데,

어느 세대가 됐든 한 10년쯤 지난 후에 이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아마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유치했어?”부터 이제야 이 감정을 알 것 같네.”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그것이 성장의 결과인지, 노화의 결과인지, 사회화의 결과인지는 개인마다 다를 테니

혹시 궁금하다면 책장에 푹 묵혀놓았다가 다시 한 번 꺼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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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소리나무가 물었다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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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소리나무를 두드려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인 '그것'을 불러내는 놀이.

15년 전 이 놀이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실종되면서 놀이에 감춰진 무서운 진실이 드러난다.

놀이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신의 얼굴과 자리를 내주고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

전통 가옥촌 도동 마을로 진입하는 국도변 갓길에서 빈 택시가 발견된다.

실종자 수사 전담 형사 차강효는 사라진 운전자 정국수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그와 관련된 인물들 중 이미 실종자가 여럿임을 알게 되고 이상함을 감지한다.

실종자들이 모두 같은 마을 출신의 친구들이라는 실마리를 따라 도동 마을로 찾아간 그는

15년 전에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듣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발상도 독특하고, 거기에서 확장된 공포 서사 역시 특별함과 신선함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친구의 죽음을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악마와의 거래를 받아들인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결국 그 거래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 받던 끝에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게 되고,

애초 악마와의 거래를 이끌었던 주인공이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만

오히려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파국은 시시각각 주인공과 친구들을 막장으로 몰아갑니다.

 

아홉 개의 소리나무를 두드려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인 그것을 불러낸다는 기이한 의식,

그것의 힘을 빌려 친구의 복수에 성공하더라도

이후 그것이 낸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거나 누구에게라도 놀이에 대해 언급할 경우

얼굴과 영혼을 빼앗긴 채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끔찍한 벌칙,

그리고,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려면 그것을 불러낸 자가 희생해야만 한다는 비극적 설정 등

각종 호러물의 코드들이 뒤범벅된 작품인데,

거기에 실종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이 개입한 미스터리 서사도 함께 전개돼서

마지막까지 긴장감과 흥미진진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야기는 방대하고 등장인물도 꽤 많은데다

자칫 잘못 언급하면 대형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서평을 쓰기가 참 난감한 작품인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전설의 고향도시괴담이 적절히 믹스된 호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17년에 읽은 전건우의 소용돌이가 자주 떠오르곤 했는데,

어린 시절 주인공과 친구들이 일으킨 특별했던 사건이 결국엔 큰 비극으로 이어졌고,

멈추지 않은 비극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들을 다시 고향에 모이게 만들었으며,

업보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큰 상처를 감내해야만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다소 아쉬운 점도 눈에 띄었는데,

무엇보다 놀이자체에 대한 설명이 때론 모호하고 때론 너무 복잡해서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의도라는 느낌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론 몰입도 저하라는 부작용이 더 커보였습니다.

후반부에 등장한 (‘놀이의 규칙과 비밀을 담은) 한 장의 그림은

꽤 중요한 단서이자 일종의 독자에게 내민 퀴즈같은 흥미로운 장치였지만

몇 번을 되읽어도 그 그림이 연상되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형사 캐릭터도 다소 작위적으로 보여 아쉬웠는데,

하필 그의 주변에도 주인공 친구들처럼 의문의 실종을 당한 사람이 있었고,

그런 탓에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연쇄실종사건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존재에 의한 범행이라는 가설까지 큰 갈등 없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스토리공모대전에서 수상한 걸 보면 영상화 가능성도 꽤 커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오히려 이해도 쉽고 몰입도도 높을 거란 생각입니다.

호러물을 읽는 건 좋아해도 보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 취향이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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