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의 재구성 -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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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도진기의 합리적 의심을 읽었는데,

그 작품이 판사들이 겪는 여러 딜레마 중 하나인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각색한) 미스터리 픽션을 통해 그렸다면,

이 작품은 실제 사건들의 판결 논리에 대한 도진기의 재해석을 담은 논픽션 작품입니다.

 

듀스 김성재의 사망, 이태원 살인사건, 낙지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사건 등

일반인들이 많이 들어본 30여개의 실제 사건들의 판결문을 낱낱이 분석하는 것은 물론,

문화와 예술에 있어 법의 잣대라든가 상고법원을 비롯한 판사 조직 내부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때 판사였으며 이젠 변호사로서 외부에서 판사 조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도진기가

그만의 비판적인 논리와 시각으로 속 시원하고 통렬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판결 결과에 대한 설명 또는 비판이라면 도진기 개인의 취향수준에 그쳤겠지만,

이 작품은 판결이 아니라 판결 논리를 분석하고 따지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사법부의 결정은 따라야 한다. 하지만 판결 안의 추론 과정마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늘 옳다는 보장이 없고, 얼마든지 헤집어볼 수 있다.

그래야 판결이 졸지 않고, 외곬 논리는 도태된다.

 

한 건을 제외하곤 모든 사건의 1, 2, 3심 판결문을 다 구해 읽어보았다.”는 말대로,

도진기는 일반인들이 납득할 수 없었던 판결들의 이면을 꼼꼼히 설명합니다.

어떤 이유로 하급심과 상급심이 다른 판결을 내린 건지,

다른 판결의 근거는 무엇이며 과연 절차와 원칙에 충실한 판결이었는지,

그것이 국민의 법 감정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무엇인지 등을 설명하는데,

간혹 여기서 소설적인 상상을 더해본다.”라는 코멘트와 함께

다소 못마땅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된 판결에 대해 자신만의 추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물론 분량의 제한 때문에 한 사건 당 할애된 페이지는 그리 길지는 않지만,

새삼 하나의 판결이 나오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판사들이 겪는 여러 가지 딜레마,

, 심신상실(미약), 정당방위, 합리적 의심, 양날의 검과 같은 엄격한 절차등과 함께

일사부재리, 배심원제, 상고법원 문제, 태부족한 판사 수 등

판사 조직의 현실적인 문제까지 친절하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서

지금까지는 다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던 판사 조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심정적으로는 유죄라고 생각하지만, 절차와 원칙을 따르면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는,

, ‘생활인으로서의 자아와 판사로서의 자아가 충돌하는 상황이 제법 자주 등장하는데,

결국 그들 역시 사람이고, 일반인들과 똑같은 딜레마를 겪는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100% 명확한 증거와 단서 없이 누군가의 인생을 박살낼 수도 있는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공포를 수반하게 될 것이고,

그런 상황과 마주한다면 역시 절차와 원칙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판사 조직 안에도 게으르거나 부정하거나 영달에만 관심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목소리가 크거나, 트러블 없이 무리 없이 사건을 처리하거나,

일보다는 인간관계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혜택과 이익을 보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이 작품이 판사 조직 안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켕기는 데가 하나라도 있는 자에게는 서늘한 교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부록처럼 실린 가벼운 글들도 눈에 띄었는데,

특히 최인훈의 광장’, 오츠이치의 ‘GOTH’,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

도진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소설들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고,

자신의 데뷔작 홍보카피로 히가시노 게이고를 지옥으로 보내버리겠다.”를 제안했었다는 고백은

비록 농담이었다고는 해도 도진기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였습니다.

 

논픽션이긴 해도 미스터리처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도진기의 팬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재미와 지식을 함께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변호사로 변신한 이후 오히려 신작 소식이 뜸한 게 무척 아쉬웠는데,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든 그의 픽션 소식이 얼른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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