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
윤재성 지음 / 새움 / 201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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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형진은 늦은 밤 집 앞에서 수상한 사내와 마주친다.

사내는 갑자기 형진에게 불을 뿜고, 형진 가족이 살던 원룸 건물까지 송두리째 태워버린다.

흉측한 몰골이 된 채 가까스로 살아남은 형진은 경찰과 언론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누구 하나 입에서 불을 뿜는방화범의 존재를 믿어주지 않는다.

결국 형진은 화상을 입은 몸으로 노숙 생활을 전전하며 홀로 범인을 뒤쫓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진실 찾기를 돕겠다는 기자 김정혜와 함께

정체불명의 방화범은 물론 악랄한 모방범을 잡기 위한 사투에 돌입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방화범을 소재로 한 스릴러 작품입니다.

멀쩡한 청년이 졸지에 방화로 인해 집과 동생을 잃고 괴물 같은 화상 자국만 얻게 됐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을 찾기 위해 홀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끝에

8년 만에 진범의 단서를 잡아내곤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형진은 방화사건 이후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갑니다.

애초 주민의 실화로 판정된데다 경찰과 언론 모두 자신의 진술을 허황된 거짓으로만 여기자

형진은 스스로 소방관이 되어 방화범을 찾을 생각도 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곤 합니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만 몰아세우는 세상에 대해 증오심을 키우던 형진은

스스로 방화범이 되어 세상에게 복수하고픈 유혹을 강렬히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형진에게 협업을 제안한 건 한때 잘 나갔던 기자 김정혜입니다.

형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특종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고,

그건 곧 바닥까지 추락한 기자로서의 위상을 복구시켜줄 무기가 될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형진에겐 상대해야 할 두 명의 악당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박살낸 방화범이고, 또 하나는 방화범 못잖게 끔직한 모방범입니다.

방화범이 일련의 목표물을 설정하고 완벽한 준비를 통해 참사를 일으킨다면,

모방범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불쇼를 벌이고 다닙니다.

그 외에 형진과 동고동락했던 노숙자들과 형진의 형 형문이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형문은 철든 이후 단 한 번도 형진을 사람 취급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방화사건 이후 거의 의절한 채 홀로 법조인으로 성공의 길을 간 인물입니다.

그런 형문에게 괴물 같은 형상을 한데다 방화범으로까지 몰린 동생 형진은

말 그대로 호적에서 파내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은존재입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주인공이 조력자들과 함께 갖은 고난 끝에 악당을 응징한다는 설정은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힘이 있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물이든 사건이든 반전이든 뭔가 한 가지 신선한 설정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독자의 흥미나 만족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오직 하나, ‘개연성의 부족때문입니다.

, ‘그럴 듯 해보여야 하는 대목들에서 전혀 혹은 다소 그럴 듯 해보이지 않았다는 얘긴데,

이 작품에는 가장 중요한 변곡점마다 ?’라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의 허술함이 엿보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몇 가지만 두루뭉술하게라도 뽑아보면...

철근까지 녹일 정도의 특별한 물질을 사용한 방화의 흔적이 있을 텐데

왜 경찰과 소방당국은 형진이 살던 원룸 건물의 화재를 주민의 실화로 단정했을까?

왜 모 방송사는 누구도 믿지 않는 형진을 소재로 개국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까?

아무리 특종이 간절해도 왜 정혜는 아무도 믿지 않는 형진을 특종의 계기로 선택했을까?

방화사건을 이용하여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서울시장 자리를 노리겠다는 정치인 설정은

과연 2019년이라는 시점에 어느 정도의 현실감이 있는가?

형진과 동고동락했던 노숙자들과 형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잘 나가는 로펌변호사 형이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준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모습은 과연 개연성이나 현실감이 있나?

 

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간된 작품이라고 출판사도 소개하고 있고,

한국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 때문에 가능하면 격려의 서평을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허술한 지점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 더 약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문장 하나하나의 디테일은 힘도 있고 매력도 있지만,

보다 거시적인 부분, 즉 이야기의 설계 과정에서 좀더 현실감을 고민해야 될 것 같고,

특히 스릴러라면 인물과 사건 모두 도구적으로, 작위적으로 설정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소위 글빨이 느껴지는 작가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계개연성만 탄탄해진다면 얼마든지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데,

작가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서평을 통해 좀더 강하게 단련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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