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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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전쯤 북스피어 인스타그램에 삼송 김사장 님의 장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다름 아닌 활자 잔혹극의 두 번째 복간 소식이었는데(초간은 1996년 고려원의 유니스의 비밀이고, 첫 복간은 2011년 북스피어의 활자 잔혹극입니다), 어찌나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로서 미안함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습니다. 더 미안했던 건 실은 2011년에 출간된 구판을 몇 년 전쯤 중고로 구입한 뒤 책장에 아주 오랫동안 방치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얼른 읽고 서평 올리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곧바로 약속 안 지키면 압수수색 드갑니다.”라는 답글이 올라왔고, 그런 연유로 원래 읽으려던 책을 덮고 부랴부랴 활자 잔혹극을 책장에서 꺼내 읽게 됐습니다. (서평 가운데 인용문과 페이지는 모두 2011년 판 기준입니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5)

 

활자 잔혹극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평을 들은 작품입니다. (출판사가 제공한 카드뉴스에 그 유명한 첫 문장이 공개돼있기에 저도 서평 첫머리에 그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를 곧장 독자에게 알린 셈인데,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라는 다소 황당한 범행동기가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문맹이란 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는 있어도 일가족을 몰살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한 범행동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문맹이란 단지 읽고 쓰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엄청난 시한폭탄임을 깨달았습니다.

 

커버데일 일가는 대저택을 관리하고 집안일을 돌볼 가정부로 40대 중반의 유니스 파치먼을 고용합니다. 잘 웃지도 않는데다 차갑고 섬뜩하기만 한 외양과 달리 유니스는 가정부로서 최고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가족 중 일부는 유니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대저택 생활은 큰 탈 없이 이어집니다. 유니스가 유일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건 활자의 문제. 대저택 곳곳에 꽂혀있는 엄청난 양의 책은 그 자체로 공포입니다. 메모나 편지를 통해 일을 지시받는 것도 극도로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가까스로 위기의 순간들을 모면하며 9개월을 보낸 어느 날, 유니스는 더 이상 문맹을 감출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그녀는 활자로 도배된 세상이 끔찍했다. 활자를 자신에게 닥친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활자는 거리를 두고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녀에게 활자를 보여주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략)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p61)

 

유니스는 명백한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무 죄책감 없이 협박과 공갈을 일삼아왔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적도 있으며, 공감 능력은 물론 감정이나 상상력 자체가 결여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이코패스 기질은 타고난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즉 문맹으로 인해 촉발되고 강화된 것입니다. 문맹임을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은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켜버렸고, 단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차원을 넘어 도덕적 문맹상태로 만들었습니다. 활자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이나 보편적 도덕마저 읽어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유니스가 유일하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가구나 장식품 등의 사물뿐입니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가 유니스에겐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상태입니다. 유니스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살짝 맛이 간 여성 조앤 스미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연 이유는 그녀가 활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니스에게 누군가 책이나 메모를 들이대며 너 문맹이지?”라고 지적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붕괴될 수밖에 없고, 그 어떤 폭주라도 가능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량도 짧고 이야기 구조도 단선적이지만 거의 50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영국 작가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의 참맛을 만끽하느라 한 줄 한 줄 공들여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는 첫 문장이 수시로 떠오르며 소름을 돋게 만들곤 해서 좀처럼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니스 파치먼의 이야기는 요즘처럼 연일 뜨거운 날이 계속 될 때 의외의 서늘함을 제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활자 잔혹극이라는 잘 만들어진 번역 제목에 눈길이 끌린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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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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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3주를 앞두고 연인 안나가 종적을 감추자 라파엘은 패닉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안나가 사라지기 직전 세 구의 참혹한 시신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고백한 탓에 라파엘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사는 퇴직형사 마르크와 함께 안나를 찾아나선 라파엘은 얼마 안 가 안나가 오랫동안 신분을 바꿔 살아온 사실, 11년 전 벌어졌던 일명 하이츠 키퍼 사건’, 10대 소녀들을 감금하고 폭행했던 사건에 안나가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나를 찾으려면 그녀의 과거를 파헤쳐야 한다고 확신한 라파엘은 파리에서의 조사를 마르크에게 맡긴 뒤 안나가 태어나고 자란 뉴욕으로 향합니다.

 

기욤 뮈소의 작품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브루클린의 소녀는 거침없는 속도감과 빠른 국면 전환에 관한 한 가장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안나를 찾기 위한 라파엘과 마르크의 조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녀에 관한 뜻밖의 정보들 때문에 엄청난 속도와 굴곡을 지닌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됩니다. 마치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과속방지턱에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과속과 역주행을 거듭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라파엘과 마르크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안나가 자발적으로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납치된 게 분명하다는 점, 그리고 그 누군가는 라파엘과 마르크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사건 관련자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의 조사는 단순한 실종된 연인 찾기가 아니라 악취와 악의가 진동하는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까지 확장됩니다.

안나의 과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라파엘과 마르크는 11년 전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왔다가 하이츠 키퍼 사건에 연루된 클레어 칼라일이란 소녀가 안나의 실체임을 확신합니다. 마르크가 파리에 남아 하이츠 키퍼 사건을 파헤치는 동안 라파엘은 뉴욕으로 날아가 클레어 칼라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뜻밖에도 같은 시기 그곳에서도 의문의 죽음이 있었던 걸 알게 되곤 이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에 엮여있음을 깨닫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밝혀질 때마다 거기에 연루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조사해야 할 사건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복잡하게 얽혀있고, 무대마저 파리와 뉴욕으로 양분되다 보니 독자 입장에선 빛의 속도로 책장을 넘기는 와중에도 넘쳐나는 새 정보와 인물들을 머릿속에 담느라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정보와 인물들 속에 안나의 행방은 물론 과거의 진실을 가리키는 작은 조각들이 숨어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얼른 책장을 넘기고 싶으면서도, 뭔가 놓친 게 없을까 싶어 다급한 마음으로 활자들을 노려봐야 하는 고도의 몰입감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과거와 현재, 파리와 뉴욕이라는 시공간 속에 배치된 여러 사건들은 대반전과 함께 해소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이 운명처럼 얽힌 끝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이 벌어진 셈인데, 그 모든 우연과 필연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탐문과 추리를 벌인 라파엘과 마르크의 여정은 우여곡절과 반전과 충격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막판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기욤 뮈소는 마지막까지 뜻밖의 반전을 남겨놓아서 독자로 하여금 책을 덮을 때까지 조금도 안심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가끔씩 마주치곤 했던 장황한 사족들입니다. 딱히 어느 대목이라고 지목하긴 어렵지만, 인물이나 배경을 소개할 때라든지, 사건과 상황을 묘사할 때라든지 한두 줄이면 충분할 것을 한두 페이지에 걸쳐 지루하게 묘사한 경우가 종종 목격되곤 했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땐 건너뛰고 싶기도 했는데, 물론 마음만 그랬고 결국 한 줄도 건너뛰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조급함이 과도해진 나머지 멀쩡한(?) 대목을 사족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만점에서 별 1개를 빼게 할 정도로 아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기욤 뮈소는 읽은 작품보다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은 작가인데, ‘브루클린의 소녀를 읽고 나니 우선 스릴러 서사에 충실한 작품부터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가씨와 밤처럼 재미있게 읽은 작품도 있지만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처럼 실망이 더 컸던 작품도 있어서 다른 독자들의 평을 살펴가며 목록을 만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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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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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뉴잉글랜드의 작은 섬 리틀톨에서 대저택에 홀로 살던 자산가 베라 도노반이 계단에서 추락해 사망합니다. 수십 년간 그녀를 모셔왔던 60대 여성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살해용의자로 지목당합니다. 경찰에 출두한 돌로레스는 괴팍하기 짝이 없는 주인마님이자 말년엔 중풍 때문에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했던 베라와의 오랜 애증의 역사는 물론 29년 전 개기일식이 벌어지던 날 남편 조를 살해한 일까지 포함하여 길고도 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스티븐 킹의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캐시 베이츠 주연의 영화도 보고 싶었지만 소설을 먼저 읽은 뒤로 미뤘는데, 영화도 잘 만들어졌다고들 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의 힘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호러 킹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킹이지만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 복잡다단한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얼마나 소름 끼칠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수십 년에 걸친 악연과 애증이 기어이 두 여자 돌로레스와 베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휴먼드라마이자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라는 교훈에 따라 가부장적이고 거만하고 폭력적인 남편을 통쾌하게 단죄하는 서스펜스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는 돌로레스의 처절한 모성애라든가 극악스런 겉모습과 달리 새카맣게 탄 속으로 수십 년을 버텨온 베라의 고통스런 인생 역정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물론 킹의 주 무기인 호러라는 양념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뿌려져있습니다.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개기일식이라는 기묘한 우주현상, 사람의 얼굴을 닮은 먼지덩어리 유령, 소름끼치는 비명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무하는 악몽 등 킹 특유의 생생한 호러 코드가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서 이야기의 볼륨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한 사람은 남편에게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지닌 자산가이고, 또 한 사람은 주정뱅이에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며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정부 겸 하녀 신세지만 베라와 돌로레스의 삶은 실은 데칼코마니에 가깝습니다. 특히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절망과 고통에 잠식된 시간이 훨씬 많았다는 점까지 닮은 탓에 두 여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이나 무겁고 편치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흥분, 분노, 욕지거리, 폭소, 비애가 모두 뒤섞인 변화무쌍한 태도로 두 명의 경찰과 한 명의 속기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돌로레스 덕분에 독자 역시 롤러코스터를 탄 듯 다양한 감정에 휩싸이며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지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마는, 그런 특별한 책읽기라고 할까요?

 

가끔 별난 간식을 챙기듯 스티븐 킹의 초중기 작품들을 읽곤 하는데,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중에서도 좀더 특별한 맛을 만끽한 작품입니다. 조만간 캐시 베이츠가 열연한 영화를 볼 생각인데, 원작을 떠올리며 영화를 보면 그 맛이 더욱 깊고 진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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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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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육상 유망주였지만 비극적인 사고 이후 마약에 중독됐던 맬러리 퀸은 18개월 동안의 재활을 거쳐 뉴저지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5살 소년 테디의 보모로 일하게 됩니다. 잠시나마 안정된 삶을 되찾았다고 여겼지만 맬러리의 일상은 테디가 그린 이상한 그림들 때문에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여자가 목 졸려 살해당한 뒤 숲으로 끌려가 매장당하는 과정을 그린 테디의 그림들은 어떻게 봐도 5살 소년의 상상력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맬러리의 의문에 대해 테디는 애냐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린 것이라고 대답하고, 테디의 부모 역시 애냐는 테디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친구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림은 점점 생생하고 정교해지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말할 수 없이 잔혹해져갑니다.

 

내용도 톤도 전혀 다르지만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지만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도 없이 오히려 지극히 사실적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5살 소년 테디로 하여금 끔찍한 살인과 암매장 과정을 그리게 만든 애냐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주인공 맬러리의 미션인데, 그 과정에서 맬러리는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수차례 경험하며 대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테디의 그림이 점점 더 전문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구체적인 스토리를 지닌 연작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초자연적 현상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표지가 바로 테디가 그린 그림 중 하나인데, 본문 속에는 이보다 더 섬찟하고 기괴한 그림들이 여러 장 수록돼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조금씩 진화하며 맬러리에게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말하자면 그림을 통해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서사가 좀더 공고하게 구축된다는 뜻인데, 그래선지 활자로만 읽은 초자연 호러물과는 사뭇 다른 톤의 공포를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 특유의 거칠고 단순하던 스케치가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드로잉으로 변하는 대목은 이야기에서도 큰 전환점 중에 하나인데, 단지 활자만으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빙의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테디의 그림 솜씨, 70여 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실종사건과 애냐의 관계, 접신의 능력자라 자칭하는 이웃 영매의 수상한 태도, 그리고 뭔가를 감추는 듯한 테디의 부모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 등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이야기 자체도 수시로 급회전하거나 역주행하는 듯 많은 변곡점을 지니고 있어서 사소한 내용 하나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은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클라이맥스 전후로 밝혀지는 뜻밖의 사실들이 맬러리는 물론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이야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렬한 반전과 함께 가혹하지만 필연적인 엔딩을 향해 달려갑니다. 특히 맬러리와 테디가 함께 하는 마지막 장면은 죽음의 경계에서 피가 난무하는 끔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싹한 초자연 스릴러이자 아름답고 가슴 저릿한 미스터리라는 홍보 카피처럼 독자의 오감을 먹먹하게 만들어서 오랫동안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장면만큼은 꼭 영상으로 보고 싶은 욕심인데, 넷플릭스와 판권 계약을 했다고 하니 기대해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작가의 이름도 생소하고 표지가 눈길을 끌긴 했어도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 큰 기대를 안 했지만 히든 픽처스는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 중 한 편이 될 것 같습니다. 초자연 호러 스릴러에 관심 없더라도 책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이야기의 힘을 꼽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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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처 : 벨몬트 아카데미의 연쇄 살인
서맨사 다우닝 지음, 신선해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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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크러처는 명문 사립고교 벨몬트 아카데미의 영문학 교사입니다. ‘올해의 교사에 선정될 정도로 능력도 있고,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와 신념 역시 확고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오만과 독선과 자기애가 강한 테디는 극성 학부모, 건방진 학생, 못마땅한 동료 교사에 대한 혐오와 짜증으로 치를 떨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 일종의 취미활동인 실험을 통해 상대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안기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실험이 예상치 못한 착오와 우연으로 인해 사망자를 유발하고 맙니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범으로 몰리고 사태가 확산되자 테디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벨몬트 아카데미는 살인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티처는 심리극의 묘미가 깃든 연쇄살인 스릴러이자 잔혹하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는 잘 짜인 한 편의 블랙 코미디입니다. 명문 사립고의 학부모와 교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동일범에 의해 살해되는 끔찍한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의 행태라든가 이야기 저변에 흐르는 신랄하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 때문에 잔혹한 블랙 코미디의 풍미를 진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극성 학부모와 건방진 학생과 속물적인 교사들로 이뤄진 명문 사립고가 갑자기 살인라는 별명을 얻고 추락하면서 우왕좌왕하는 벌이는 꼴사나운 모습은 B급 군상극의 재미도 선사합니다. 초반에 범인과 수법이 모두 공개됨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 안에 다양한 장르가 혼재돼서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란 뜻입니다.

 

이런 학생들을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이토록 애쓰고 애쓰고 또 애쓰는데도 때로는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다 그들을 위한 일이다.” (p254)

 

벨몬트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의 출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테디가 교사로서 가진 확고한 신념과 태도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학생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교사라고 여기고 행동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헌신을 거부하거나 못 알아먹는 학생에겐 무자비한 응징을 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범인으로 몰린 학생을 구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정의로운(?) 교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학생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무자비한 사이코패스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다 너희를 위한 일이야.”라는 의미의 원제 ‘For Your Own Good’은 바로 테디의 대의이자 삶의 좌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죄다. 하지만 제자들을 일생일대의 위기에서 구출해내기 위해서였다면 그건 넓은 의미로 가 아닌지도 모른다.” (p390)

 

테디의 광폭 행보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를 의심하고 뒤를 캐는 몇몇 인물들의 스릴감 넘치는 추적기입니다. 심증은 충분하지만 애매하게 조각난 단서들밖에 손에 넣지 못한 그들이 테디의 주변을 맴도는 장면들은 나름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그들이 과연 테디의 행각을 밝혀낼 수 있을지, 저러다가 테디에게 당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과연 테디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그가 체포되기는 하는 건지, 그에게 목숨을 잃을 사람이 얼마나 더 나올지,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는 할지 가늠할 수 없어서 마지막 장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서맨사 다우닝은 2020마이 러블리 와이프로 한국에 처음 소개됐는데, 심리스릴러 혹은 도메스틱 스릴러에 한참 질려 있을 때라 제목만 보곤 바로 외면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티처를 읽고 나니 궁금증과 호기심이 저절로 발동해서 기회가 되면 일단 초반 100페이지 정도만이라도 도전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테디 크러처 못잖은 흥미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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