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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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3주를 앞두고 연인 안나가 종적을 감추자 라파엘은 패닉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안나가 사라지기 직전 세 구의 참혹한 시신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고백한 탓에 라파엘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사는 퇴직형사 마르크와 함께 안나를 찾아나선 라파엘은 얼마 안 가 안나가 오랫동안 신분을 바꿔 살아온 사실, 11년 전 벌어졌던 일명 하이츠 키퍼 사건’, 10대 소녀들을 감금하고 폭행했던 사건에 안나가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나를 찾으려면 그녀의 과거를 파헤쳐야 한다고 확신한 라파엘은 파리에서의 조사를 마르크에게 맡긴 뒤 안나가 태어나고 자란 뉴욕으로 향합니다.

 

기욤 뮈소의 작품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브루클린의 소녀는 거침없는 속도감과 빠른 국면 전환에 관한 한 가장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안나를 찾기 위한 라파엘과 마르크의 조사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녀에 관한 뜻밖의 정보들 때문에 엄청난 속도와 굴곡을 지닌 롤러코스터처럼 전개됩니다. 마치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과속방지턱에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과속과 역주행을 거듭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라파엘과 마르크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안나가 자발적으로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납치된 게 분명하다는 점, 그리고 그 누군가는 라파엘과 마르크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사건 관련자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의 조사는 단순한 실종된 연인 찾기가 아니라 악취와 악의가 진동하는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까지 확장됩니다.

안나의 과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라파엘과 마르크는 11년 전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왔다가 하이츠 키퍼 사건에 연루된 클레어 칼라일이란 소녀가 안나의 실체임을 확신합니다. 마르크가 파리에 남아 하이츠 키퍼 사건을 파헤치는 동안 라파엘은 뉴욕으로 날아가 클레어 칼라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뜻밖에도 같은 시기 그곳에서도 의문의 죽음이 있었던 걸 알게 되곤 이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줄기에 엮여있음을 깨닫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밝혀질 때마다 거기에 연루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조사해야 할 사건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복잡하게 얽혀있고, 무대마저 파리와 뉴욕으로 양분되다 보니 독자 입장에선 빛의 속도로 책장을 넘기는 와중에도 넘쳐나는 새 정보와 인물들을 머릿속에 담느라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정보와 인물들 속에 안나의 행방은 물론 과거의 진실을 가리키는 작은 조각들이 숨어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얼른 책장을 넘기고 싶으면서도, 뭔가 놓친 게 없을까 싶어 다급한 마음으로 활자들을 노려봐야 하는 고도의 몰입감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과거와 현재, 파리와 뉴욕이라는 시공간 속에 배치된 여러 사건들은 대반전과 함께 해소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연과 필연이 운명처럼 얽힌 끝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이 벌어진 셈인데, 그 모든 우연과 필연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탐문과 추리를 벌인 라파엘과 마르크의 여정은 우여곡절과 반전과 충격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막판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기욤 뮈소는 마지막까지 뜻밖의 반전을 남겨놓아서 독자로 하여금 책을 덮을 때까지 조금도 안심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가끔씩 마주치곤 했던 장황한 사족들입니다. 딱히 어느 대목이라고 지목하긴 어렵지만, 인물이나 배경을 소개할 때라든지, 사건과 상황을 묘사할 때라든지 한두 줄이면 충분할 것을 한두 페이지에 걸쳐 지루하게 묘사한 경우가 종종 목격되곤 했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땐 건너뛰고 싶기도 했는데, 물론 마음만 그랬고 결국 한 줄도 건너뛰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조급함이 과도해진 나머지 멀쩡한(?) 대목을 사족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만점에서 별 1개를 빼게 할 정도로 아쉬웠던 게 사실입니다.

 

기욤 뮈소는 읽은 작품보다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은 작가인데, ‘브루클린의 소녀를 읽고 나니 우선 스릴러 서사에 충실한 작품부터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가씨와 밤처럼 재미있게 읽은 작품도 있지만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처럼 실망이 더 컸던 작품도 있어서 다른 독자들의 평을 살펴가며 목록을 만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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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 걸작선 4
스티븐 킹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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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뉴잉글랜드의 작은 섬 리틀톨에서 대저택에 홀로 살던 자산가 베라 도노반이 계단에서 추락해 사망합니다. 수십 년간 그녀를 모셔왔던 60대 여성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 죽음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살해용의자로 지목당합니다. 경찰에 출두한 돌로레스는 괴팍하기 짝이 없는 주인마님이자 말년엔 중풍 때문에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했던 베라와의 오랜 애증의 역사는 물론 29년 전 개기일식이 벌어지던 날 남편 조를 살해한 일까지 포함하여 길고도 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스티븐 킹의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드디어 읽었습니다. 캐시 베이츠 주연의 영화도 보고 싶었지만 소설을 먼저 읽은 뒤로 미뤘는데, 영화도 잘 만들어졌다고들 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의 힘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호러 킹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킹이지만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 복잡다단한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얼마나 소름 끼칠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수십 년에 걸친 악연과 애증이 기어이 두 여자 돌로레스와 베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휴먼드라마이자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라는 교훈에 따라 가부장적이고 거만하고 폭력적인 남편을 통쾌하게 단죄하는 서스펜스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는 돌로레스의 처절한 모성애라든가 극악스런 겉모습과 달리 새카맣게 탄 속으로 수십 년을 버텨온 베라의 고통스런 인생 역정도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물론 킹의 주 무기인 호러라는 양념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뿌려져있습니다.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개기일식이라는 기묘한 우주현상, 사람의 얼굴을 닮은 먼지덩어리 유령, 소름끼치는 비명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무하는 악몽 등 킹 특유의 생생한 호러 코드가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서 이야기의 볼륨감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한 사람은 남편에게 물려받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지닌 자산가이고, 또 한 사람은 주정뱅이에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며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정부 겸 하녀 신세지만 베라와 돌로레스의 삶은 실은 데칼코마니에 가깝습니다. 특히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절망과 고통에 잠식된 시간이 훨씬 많았다는 점까지 닮은 탓에 두 여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이나 무겁고 편치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흥분, 분노, 욕지거리, 폭소, 비애가 모두 뒤섞인 변화무쌍한 태도로 두 명의 경찰과 한 명의 속기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돌로레스 덕분에 독자 역시 롤러코스터를 탄 듯 다양한 감정에 휩싸이며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지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마는, 그런 특별한 책읽기라고 할까요?

 

가끔 별난 간식을 챙기듯 스티븐 킹의 초중기 작품들을 읽곤 하는데,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그중에서도 좀더 특별한 맛을 만끽한 작품입니다. 조만간 캐시 베이츠가 열연한 영화를 볼 생각인데, 원작을 떠올리며 영화를 보면 그 맛이 더욱 깊고 진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킹의 팬이 아니더라도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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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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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육상 유망주였지만 비극적인 사고 이후 마약에 중독됐던 맬러리 퀸은 18개월 동안의 재활을 거쳐 뉴저지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5살 소년 테디의 보모로 일하게 됩니다. 잠시나마 안정된 삶을 되찾았다고 여겼지만 맬러리의 일상은 테디가 그린 이상한 그림들 때문에 뒤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여자가 목 졸려 살해당한 뒤 숲으로 끌려가 매장당하는 과정을 그린 테디의 그림들은 어떻게 봐도 5살 소년의 상상력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맬러리의 의문에 대해 테디는 애냐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린 것이라고 대답하고, 테디의 부모 역시 애냐는 테디가 만들어낸 상상속의 친구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림은 점점 생생하고 정교해지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말할 수 없이 잔혹해져갑니다.

 

내용도 톤도 전혀 다르지만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스릴러지만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도 없이 오히려 지극히 사실적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5살 소년 테디로 하여금 끔찍한 살인과 암매장 과정을 그리게 만든 애냐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주인공 맬러리의 미션인데, 그 과정에서 맬러리는 과학이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수차례 경험하며 대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테디의 그림이 점점 더 전문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도 구체적인 스토리를 지닌 연작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초자연적 현상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표지가 바로 테디가 그린 그림 중 하나인데, 본문 속에는 이보다 더 섬찟하고 기괴한 그림들이 여러 장 수록돼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조금씩 진화하며 맬러리에게 뭔가를 호소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말하자면 그림을 통해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서사가 좀더 공고하게 구축된다는 뜻인데, 그래선지 활자로만 읽은 초자연 호러물과는 사뭇 다른 톤의 공포를 맛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 특유의 거칠고 단순하던 스케치가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드로잉으로 변하는 대목은 이야기에서도 큰 전환점 중에 하나인데, 단지 활자만으로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몰입감을 제공합니다.

 

빙의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테디의 그림 솜씨, 70여 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실종사건과 애냐의 관계, 접신의 능력자라 자칭하는 이웃 영매의 수상한 태도, 그리고 뭔가를 감추는 듯한 테디의 부모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 등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워낙 많기도 하거니와 이야기 자체도 수시로 급회전하거나 역주행하는 듯 많은 변곡점을 지니고 있어서 사소한 내용 하나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은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클라이맥스 전후로 밝혀지는 뜻밖의 사실들이 맬러리는 물론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이야기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강렬한 반전과 함께 가혹하지만 필연적인 엔딩을 향해 달려갑니다. 특히 맬러리와 테디가 함께 하는 마지막 장면은 죽음의 경계에서 피가 난무하는 끔찍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싹한 초자연 스릴러이자 아름답고 가슴 저릿한 미스터리라는 홍보 카피처럼 독자의 오감을 먹먹하게 만들어서 오랫동안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장면만큼은 꼭 영상으로 보고 싶은 욕심인데, 넷플릭스와 판권 계약을 했다고 하니 기대해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작가의 이름도 생소하고 표지가 눈길을 끌긴 했어도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 큰 기대를 안 했지만 히든 픽처스는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 중 한 편이 될 것 같습니다. 초자연 호러 스릴러에 관심 없더라도 책 선택의 중요한 기준으로 이야기의 힘을 꼽는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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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처 : 벨몬트 아카데미의 연쇄 살인
서맨사 다우닝 지음, 신선해 옮김 / 황금시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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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 크러처는 명문 사립고교 벨몬트 아카데미의 영문학 교사입니다. ‘올해의 교사에 선정될 정도로 능력도 있고,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와 신념 역시 확고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오만과 독선과 자기애가 강한 테디는 극성 학부모, 건방진 학생, 못마땅한 동료 교사에 대한 혐오와 짜증으로 치를 떨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 일종의 취미활동인 실험을 통해 상대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안기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실험이 예상치 못한 착오와 우연으로 인해 사망자를 유발하고 맙니다. 엉뚱한 사람이 살인범으로 몰리고 사태가 확산되자 테디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벨몬트 아카데미는 살인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티처는 심리극의 묘미가 깃든 연쇄살인 스릴러이자 잔혹하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는 잘 짜인 한 편의 블랙 코미디입니다. 명문 사립고의 학부모와 교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동일범에 의해 살해되는 끔찍한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의 행태라든가 이야기 저변에 흐르는 신랄하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 때문에 잔혹한 블랙 코미디의 풍미를 진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극성 학부모와 건방진 학생과 속물적인 교사들로 이뤄진 명문 사립고가 갑자기 살인라는 별명을 얻고 추락하면서 우왕좌왕하는 벌이는 꼴사나운 모습은 B급 군상극의 재미도 선사합니다. 초반에 범인과 수법이 모두 공개됨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 안에 다양한 장르가 혼재돼서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란 뜻입니다.

 

이런 학생들을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이토록 애쓰고 애쓰고 또 애쓰는데도 때로는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다 그들을 위한 일이다.” (p254)

 

벨몬트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의 출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테디가 교사로서 가진 확고한 신념과 태도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학생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교사라고 여기고 행동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헌신을 거부하거나 못 알아먹는 학생에겐 무자비한 응징을 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범인으로 몰린 학생을 구하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정의로운(?) 교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학생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무자비한 사이코패스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다 너희를 위한 일이야.”라는 의미의 원제 ‘For Your Own Good’은 바로 테디의 대의이자 삶의 좌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죄다. 하지만 제자들을 일생일대의 위기에서 구출해내기 위해서였다면 그건 넓은 의미로 가 아닌지도 모른다.” (p390)

 

테디의 광폭 행보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를 의심하고 뒤를 캐는 몇몇 인물들의 스릴감 넘치는 추적기입니다. 심증은 충분하지만 애매하게 조각난 단서들밖에 손에 넣지 못한 그들이 테디의 주변을 맴도는 장면들은 나름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독자 입장에선 그들이 과연 테디의 행각을 밝혀낼 수 있을지, 저러다가 테디에게 당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과연 테디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그가 체포되기는 하는 건지, 그에게 목숨을 잃을 사람이 얼마나 더 나올지,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는 할지 가늠할 수 없어서 마지막 장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서맨사 다우닝은 2020마이 러블리 와이프로 한국에 처음 소개됐는데, 심리스릴러 혹은 도메스틱 스릴러에 한참 질려 있을 때라 제목만 보곤 바로 외면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티처를 읽고 나니 궁금증과 호기심이 저절로 발동해서 기회가 되면 일단 초반 100페이지 정도만이라도 도전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테디 크러처 못잖은 흥미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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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
리브 앤더슨 지음, 최유솔 옮김 / 그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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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코니와 순종적이고 연약한 리사는 아기 때 양모(養母) 이브에게 입양된 쌍둥이입니다. 가학적인데다 모든 걸 통제하길 원했던 이브는 쌍둥이에게 잔혹한 차별대우와 함께 정신적인 고문을 일삼았는데, 특히 코니에겐 이른바 생존게임, 즉 몇 푼의 돈만 쥐어준 채 낯선 도시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하곤 했습니다. 쌍둥이가 26살이 된 해, 이브가 뜻밖의 사고로 사망하자 코니는 해방감을 만끽하지만, 그녀가 남긴 잔인한 유언장 때문에 새로운 생존게임을 시작할 처지에 놓입니다. 리사에게 거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 이브는 코니에겐 뉴멕시코주 닐라의 황량한 사막에 있는 작은 빨간 집만을 물려줍니다. 문제는 그 빨간 집이 위치한 닐라는 오래 전부터 무수한 여자들이 실종되거나 살해된 끔찍한 장소라는 점입니다.

 

일그러지고 비틀린 소시오패스들이 난무하는 독특한 스릴러입니다. 15살 나이에 출산과 동시에 자기보다 27살 많은 남자와 결혼한 뒤 오랫동안 끔찍한 학대를 당하다가 남편이 사망하자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이브, 죽은 아버지를 꼭 닮아 잔혹하고 반항적인 10대가 된 이브의 딸 켈시, 그리고 이브에게 입양된 뒤 감금과 학대와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성장한 쌍둥이 코니와 리사 등 이 작품 속의 주요 인물들은 평범함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캐릭터들입니다.

또한 20여 년 전부터 최근까지 닐라에서 벌어진 무수한 납치살인사건 역시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의 소행으로밖에 볼 수 없고, 닐라를 지배하고 있는 음울하고 불온한 분위기라든가 납치살인사건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는 주민들의 비밀스런 행태는 그 자체로 무형의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집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닐라의 빨간 집에 살게 된 코니의 이야기로, 죽어서까지 자신에게 가혹한 생존게임을 강요하는 이브의 태도에 의문과 분노를 품던 코니가 닐라에서 벌어진 연쇄 납치살인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위험천만한 탐문을 전개하는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20여 년 전, 실종된 10대 딸 켈시를 찾기 위해 닐라에 온 이브가 온갖 위협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힘으로 분투하는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건 이브의 분투가 결코 상식적인 모성애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일종의 게임, 즉 반드시 켈시를 찾아내 굴복시키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됐다는 점입니다.

 

코니와 이브의 여정은 언제든 끔찍한 결말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상대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쉴 틈 없이 벌어집니다. 또한 20여 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코니와 이브는 마치 하나의 진실을 찾기 위해 달려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들, 같은 사건들이 두 사람의 행보에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코니와 이브는 닐라에 만연한 비밀과 거짓말을 걷어내고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애쓰지만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서있는 섬뜩한 빨간 집은 두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남깁니다.

 

초중반까지만 해도 줄거리와 캐릭터 모두 꽤 흥미진진한 서사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이야기 자체가 산만해진 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두세 번만 비틀어도 괜찮았을 텐데 지나치게 비틀고 또 비튼 나머지 오히려 집중력을 흐트러뜨렸습니다. 사건뿐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과 내면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선지 주요 인물들의 경우 다 읽고도 이 사람은 이런이런 사람이었다.’라고 딱 부러지게 정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결말부도 다소 불만스러웠는데, 연쇄 납치살인의 진실도, 실종된 딸 켈시의 행방도 딱히 반전이나 해결의 매력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일부는 충분히 예측가능하기도 했고 일부는 작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알게 됐지만 ?’는 모호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닐라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소시오패스의 광란의 결과이니 ?’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개운치 못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게 돼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수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적잖은 오타들이 눈에 많이 거슬렸습니다. 조사(助詞) 오타가 특히 많았고, 주요 지명 중 하나가 샌타페이-산타페이-산타페로 계속 바뀌기기도 했습니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다른 건 몰라도 오타만큼은 어떻게 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한두 개라면 모르겠지만, 그 이상이라면 실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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