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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ㅣ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평점 :
1주일 전쯤 북스피어 인스타그램에 삼송 김사장 님의 장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다름 아닌 ‘활자 잔혹극’의 두 번째 복간 소식이었는데(초간은 1996년 고려원의 ‘유니스의 비밀’이고, 첫 복간은 2011년 북스피어의 ‘활자 잔혹극’입니다), 어찌나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지(?)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로서 미안함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습니다. 더 미안했던 건 실은 2011년에 출간된 구판을 몇 년 전쯤 중고로 구입한 뒤 책장에 아주 오랫동안 방치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얼른 읽고 서평 올리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는데, 곧바로 “약속 안 지키면 압수수색 드갑니다.”라는 답글이 올라왔고, 그런 연유로 원래 읽으려던 책을 덮고 부랴부랴 ‘활자 잔혹극’을 책장에서 꺼내 읽게 됐습니다. (서평 가운데 인용문과 페이지는 모두 2011년 판 기준입니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p5)
‘활자 잔혹극’은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평을 들은 작품입니다. (출판사가 제공한 카드뉴스에 그 유명한 첫 문장이 공개돼있기에 저도 서평 첫머리에 그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범인의 정체와 범행동기를 곧장 독자에게 알린 셈인데,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라는 다소 황당한 범행동기가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문맹이란 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는 있어도 일가족을 몰살하게 만들 정도로 지독한 범행동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 문맹이란 단지 읽고 쓰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엄청난 시한폭탄임을 깨달았습니다.
커버데일 일가는 대저택을 관리하고 집안일을 돌볼 가정부로 40대 중반의 유니스 파치먼을 고용합니다. 잘 웃지도 않는데다 차갑고 섬뜩하기만 한 외양과 달리 유니스는 가정부로서 최고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가족 중 일부는 유니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대저택 생활은 큰 탈 없이 이어집니다. 유니스가 유일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건 활자의 문제. 대저택 곳곳에 꽂혀있는 엄청난 양의 책은 그 자체로 공포입니다. 메모나 편지를 통해 일을 지시받는 것도 극도로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가까스로 위기의 순간들을 모면하며 9개월을 보낸 어느 날, 유니스는 더 이상 문맹을 감출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624/pimg_7516201784336448.jpg)
“그녀는 활자로 도배된 세상이 끔찍했다. 활자를 자신에게 닥친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활자는 거리를 두고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녀에게 활자를 보여주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중략)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p61)
유니스는 명백한 사이코패스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무 죄책감 없이 협박과 공갈을 일삼아왔고,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적도 있으며, 공감 능력은 물론 감정이나 상상력 자체가 결여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사이코패스 기질은 타고난 것도 아니고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즉 문맹으로 인해 촉발되고 강화된 것입니다. 문맹임을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은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켜버렸고, 단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차원을 넘어 ‘도덕적 문맹’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활자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이나 보편적 도덕마저 읽어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유니스가 유일하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가구나 장식품 등의 사물뿐입니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가 유니스에겐 가장 안온하고 행복한 상태입니다. 유니스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살짝 맛이 간 여성 조앤 스미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연 이유는 그녀가 활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니스에게 누군가 책이나 메모를 들이대며 “너 문맹이지?”라고 지적한다면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붕괴될 수밖에 없고, 그 어떤 폭주라도 가능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량도 짧고 이야기 구조도 단선적이지만 거의 50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영국 작가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의 참맛을 만끽하느라 한 줄 한 줄 공들여 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는 첫 문장이 수시로 떠오르며 소름을 돋게 만들곤 해서 좀처럼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니스 파치먼의 이야기는 요즘처럼 연일 뜨거운 날이 계속 될 때 의외의 서늘함을 제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활자 잔혹극’이라는 잘 만들어진 번역 제목에 눈길이 끌린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