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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슬론, 아디, 그레이스는 대기업 법무팀에서 일하는 변호사이자 절친한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각각 10대 딸과의 갈등, 싱글맘이 된 후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 출산 직후 찾아온 힘겨운 산후우울증 등 내밀한 고민들을 갖고 있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겨운 직장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18층 발코니에서 누군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필 새 CEO 후보로 거론되던 에임스 개릿이 사내 여성들에 대한 부적절한 언행과 성희롱 혐의로 슬론 일행에게 소송을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추락사 사건은 회사 안팎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언론과 인터넷에선 젠더 갈등에 관한 찬반 격론이 벌어지고 경찰은 에임스를 향한 슬론 일행의 소송이 추락사 사건과 연관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미투 시대의 페미니즘 스릴러”는 이 작품의 성격을 잘 압축해놓은 한 매체의 추천사인데,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즉각적인 갈등과 격론을 유발하는 요즘 같은 시국에는 이런 추천사가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와 미덕을 오인하게 만들 수도 있어서 아주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위스퍼 네트워크(Whisper Network)는 “자신이 종사하는 산업의 남성 권력자 중 성희롱이나 성추행 혐의가 있는 이들의 명단을 공유하는 여성들 사이의 정보 네트워크.”입니다. 슬론 일행은 ‘댈러스 일대의 나쁜 놈들’의 명단인 ‘배드맨 리스트’를 입수한 뒤 거기에 새 CEO 후보인 에임스를 추가한 것은 물론 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피해자를 낳은 그가 새 CEO에 오른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데없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슬론 일행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추락사가 ‘배드맨 리스트’와 관련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들과 온종일 낚시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엄마는 애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점심시간을 넘겼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대체로 더 낫다. 아이 덕에 남자는 영웅 소리를 듣지만 여자는 변변찮은 직원으로 전락한다.” (p21)
사람들은 은연중에 미투 사건의 피해자는 대부분 힘없고 약한 자들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기업 법무팀의 변호사들이 피해자로 등장한 점은 초반부터 눈길을 끄는 설정이었습니다. 또, 미투 사건을 논외로 하더라도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직장 내 남녀 차별이 직업이나 직종은 물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계 어디서나 벌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란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부당한 현실이 제자리를 잡을 날이 오긴 올까요?
이 작품이 미스터리/스릴러로 분류되는 이유는 추락사 사건 때문입니다. 작가는 초중반까지 추락사한 인물이 누구인지 감춥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밝혀진 뒤로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냐, 또 슬론 일행은 ‘배드맨 리스트’에 에임스의 이름을 올린 일과 그를 상대로 건 소송 때문에 맞이한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미스터리의 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누군지는 너무 빤히 보여서 그리 궁금증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독자들의 관심은 타살 여부와 슬론 일행의 위기 탈출 과정에 쏠리게 되는데, 이야기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진 현재와 그로부터 3주 전의 과거가 교차로 전개되면서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다만 이 작품을 ‘제대로 된’ 미스터리/스릴러로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은 맥 빠지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이혼, 출산, 양육, 일과 가정, 성희롱 등 슬론 일행을 통해 그려지는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이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데, 그런 탓에 팽팽한 미스터리/스릴러로서의 매력은 부차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슬론 일행이 겪는 힘들고 고된 삶이 다소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서 지루하고 느슨하게 읽힌 점이 아쉬웠는데, 사실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에 새삼 새로울 것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캐릭터나 상황 묘사에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된 건 2019년입니다. 한국의 본격적인 미투 운동의 시작을 2018년이라고 볼 때 좀더 일찍 국내에 소개됐더라면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됐을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다소 지루하고 느슨한 대목들이 단점이긴 하지만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라 좀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