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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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론, 아디, 그레이스는 대기업 법무팀에서 일하는 변호사이자 절친한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각각 10대 딸과의 갈등, 싱글맘이 된 후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 출산 직후 찾아온 힘겨운 산후우울증 등 내밀한 고민들을 갖고 있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겨운 직장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18층 발코니에서 누군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하필 새 CEO 후보로 거론되던 에임스 개릿이 사내 여성들에 대한 부적절한 언행과 성희롱 혐의로 슬론 일행에게 소송을 당한 상태에서 벌어진 추락사 사건은 회사 안팎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언론과 인터넷에선 젠더 갈등에 관한 찬반 격론이 벌어지고 경찰은 에임스를 향한 슬론 일행의 소송이 추락사 사건과 연관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미투 시대의 페미니즘 스릴러는 이 작품의 성격을 잘 압축해놓은 한 매체의 추천사인데,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즉각적인 갈등과 격론을 유발하는 요즘 같은 시국에는 이런 추천사가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와 미덕을 오인하게 만들 수도 있어서 아주 조심스러워 보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위스퍼 네트워크(Whisper Network)자신이 종사하는 산업의 남성 권력자 중 성희롱이나 성추행 혐의가 있는 이들의 명단을 공유하는 여성들 사이의 정보 네트워크.”입니다. 슬론 일행은 댈러스 일대의 나쁜 놈들의 명단인 배드맨 리스트를 입수한 뒤 거기에 새 CEO 후보인 에임스를 추가한 것은 물론 그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피해자를 낳은 그가 새 CEO에 오른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데없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슬론 일행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추락사가 배드맨 리스트와 관련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들과 온종일 낚시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엄마는 애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점심시간을 넘겼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대체로 더 낫다. 아이 덕에 남자는 영웅 소리를 듣지만 여자는 변변찮은 직원으로 전락한다.” (p21)

 

사람들은 은연중에 미투 사건의 피해자는 대부분 힘없고 약한 자들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기업 법무팀의 변호사들이 피해자로 등장한 점은 초반부터 눈길을 끄는 설정이었습니다. , 미투 사건을 논외로 하더라도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직장 내 남녀 차별이 직업이나 직종은 물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계 어디서나 벌어지는 보편적인 현상이란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부당한 현실이 제자리를 잡을 날이 오긴 올까요?

 

이 작품이 미스터리/스릴러로 분류되는 이유는 추락사 사건 때문입니다. 작가는 초중반까지 추락사한 인물이 누구인지 감춥니다. 그리고 그 인물이 밝혀진 뒤로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냐, 또 슬론 일행은 배드맨 리스트에 에임스의 이름을 올린 일과 그를 상대로 건 소송 때문에 맞이한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미스터리의 축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누군지는 너무 빤히 보여서 그리 궁금증을 일으키진 못합니다. 독자들의 관심은 타살 여부와 슬론 일행의 위기 탈출 과정에 쏠리게 되는데, 이야기는 추락사 사건이 벌어진 현재와 그로부터 3주 전의 과거가 교차로 전개되면서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다만 이 작품을 제대로 된미스터리/스릴러로 기대한 독자에겐 조금은 맥 빠지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이혼, 출산, 양육, 일과 가정, 성희롱 등 슬론 일행을 통해 그려지는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이 거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는데, 그런 탓에 팽팽한 미스터리/스릴러로서의 매력은 부차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슬론 일행이 겪는 힘들고 고된 삶이 다소 뻔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서 지루하고 느슨하게 읽힌 점이 아쉬웠는데, 사실 여성들의 힘들고 고된 삶에 새삼 새로울 것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캐릭터나 상황 묘사에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간된 건 2019년입니다. 한국의 본격적인 미투 운동의 시작을 2018년이라고 볼 때 좀더 일찍 국내에 소개됐더라면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됐을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다소 지루하고 느슨한 대목들이 단점이긴 하지만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작품이라 좀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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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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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비롯 모두 4편의 중단편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마니아까지는 아니어도 스티븐 킹의 독특하고 오싹한 호러물을 즐겨 읽는 편인데, 특히 그의 중단편 작품집은 장편 못잖은 쫄깃쫄깃하고 알찬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흥미롭게 읽힌 경우가 많습니다. ‘악몽을 파는 가게’, ‘자정 4분 뒤’, ‘별도 없는 한밤에가 대표적인데 그중에서도 별도 없는 한밤에는 스티븐 킹을 전혀 모르는 독자조차 금세 그의 호러월드에 빠져들게 만드는 만점짜리 작품집이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을 읽을 때면 매번 비슷한 궁금증 - “도대체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 - 이 생기곤 합니다. 시신과 함께 매장된 아이폰이 몇 달이 지나도록 배터리가 닳지 않는 것은 물론 소통마저 가능하게 만든다는 설정(해리건 씨의 전화기), 60년이 넘도록 늙지도 변하지도 않은 채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파먹는 존재(피가 흐르는 곳에), 오지의 통나무집에서 소설 집필에 몰두하다가 독감과 폭풍에 휘말린 주인공이 시궁쥐와의 악마적 거래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는 이야기() 등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리지 못할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퍼올리는 스티븐 킹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저절로 감탄을 자아낼 뿐입니다.

 

이 작품의 표제작이자 거의 절반 가까이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피가 흐르는 곳에는 스티븐 킹의 빌 호지스 3부작아웃사이더 1~2’를 읽은 독자에겐 또 다른 흥분을 선사하는데, 우선 주인공이 앞선 두 작품에 등장했던 홀리 기브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스티븐 킹의 첫 탐정 미스터리인 빌 호지스 3부작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했던 중년여성 홀리 기브니는 이후 아웃사이더 1~2’를 통해 독립했다가, ‘피가 흐르는 곳에서는 완전 1인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개인적으론 아웃사이더 1~2’를 읽지 못해서 이 작품 속의 홀리 기브니의 공포심을 100%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그녀가 맹활약했던 빌 호지스 3부작을 떠올릴 수 있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또 한 가지 독자를 흥분시킨 요소는 스티븐 킹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범인의 정체입니다. ‘빌 호지스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엔드 오브 왓치가 인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괴물을 다뤘고, ‘아웃사이더 1~2’가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목격된 용의자라는 독특한 설정을 앞세웠다면, ‘피가 흐르는 곳에는 오랜 세월동안 조금도 늙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자양분으로 삼아온 끔찍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 세 캐릭터는 결국 같은 범주의 악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초현실적이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이긴 하지만, ‘샤이닝을 비롯하여 스티븐 킹의 호러물에 한번이라도 매료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얼마든지 흥겹게 만끽할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첫 수록작인 해리건 씨의 전화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단막극이나 단편영화로 만든다면 그 오싹함이 훨씬 더 배가될 것 같습니다. , 스티븐 킹이 작가의 말을 통해 아낌없이 애정을 드러낸 주인공 홀리 기브니가 등장한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머잖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후속작이 출간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앞서 (그녀가 맹활약했던) ‘아웃사이더 1~2’를 먼저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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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더 미세스 - 정유정 작가 강력 추천
메리 쿠비카 지음,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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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윌의 외도, 아들 오토의 퇴학, 응급의학과 의사였던 자신의 의료사고 등 한꺼번에 터진 인생 최악의 사건들 때문에 궁지에 몰렸던 세이디는 남편 윌의 제안에 따라 자살한 시누이 앨리스가 남긴 메인 주의 외딴 섬의 낡은 저택으로 이사합니다. 섬 특유의 배타적 분위기에 낡은 저택이 내뿜는 불온한 기운까지 더해져 세이디의 절망감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살던 여자가 참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는데, 문제는 현지 경찰이 세이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죽은 옛 연인의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남편, 전학 후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대놓고 악의를 발산하는 시누이의 딸 등 사방에서 날을 세운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세이디는 살인용의자로 몰리는 처지에 이르자 스스로 범인을 찾을 결심을 합니다.

 

이야기는 세 여자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외딴 섬에서 온갖 스트레스와 절망을 겪던 세이디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뒤 직접 범인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합니다. 이어 세이디의 남편 윌에게 집착하며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카밀의 이야기가 간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6살 소녀 마우스가 새 엄마에게 학대당하는 끔찍한 상황이 막간극처럼 소개됩니다.

 

음습한 늦가을의 외딴 섬, 남편의 외도, 스토커에 가까운 불륜녀, 잔혹하게 난자당한 피살자, 살의를 내뿜는 시누이의 딸 등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의 요소들을 골고루 갖춘 작품이지만 디 아더 미세스는 극단적인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끈적끈적한 심리스릴러입니다. 가족이나 일터의 동료는 물론 외딴 섬의 불온한 기운과 시누이가 자살한 낡은 저택의 공포까지 감당해야 하는 세이디의 심리가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또 언제라도 세이디를 공격할 것만 같은 불륜녀 카밀의 들끓는 욕망은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긴장감을 맛보게 만듭니다.

이웃의 여자가 칼로 난자당한 채 살해된 사건은 흥미진진한 미스터리이자 불안정한 상황의 세이디를 막다른 벽에 몰아넣는 카운터펀치인데, 세이디의 주변 인물 중 누가 범인으로 밝혀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미묘하게 전개됩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두 가지 정도 아쉬움이 남은 작품입니다. (대형 스포일러라서 자세한 언급은 못 하지만) 우선 이 작품은 막판에 두 번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 첫 반전이 저의 취향과 맞지 않았는데, 실은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중반쯤부터 슬슬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작가가 꽤 많은 힌트를 줘서 그 반전이 폭로됐을 때 딱히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금했던 건 작가의 의도였습니다. 독자가 눈치 채길 바라고 일부러 그 많은 힌트들을 준 건지, 아니면 독자들이 그 힌트들을 몰라보곤 막판 반전에 놀라기를 바란 건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앞서 제공된 힌트들을 전복시키는 신선한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역시 그렇군...”이란 아쉬움만 남고 말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두 번째 반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사한 설정으로 실망감만 남긴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이 두 번째 반전디 아더 미세스만의 고유한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분량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또 동어반복처럼 그려진 세이디의 공포와 절망에 대한 묘사는 심리스릴러 마니아가 아니라면 다소 지루하고 느슨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인데, 살인사건 미스터리가 병행되긴 했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심리스릴러는 아무래도 좀 무리였다는 생각입니다.

 

메리 쿠비카는 디 아더 미세스로 처음 만난 작가인데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필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국에 먼저 소개된 그녀의 작품 굿 걸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심리스릴러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있는 장르지만 페이지터너의 힘을 갖춘 작가라면 기꺼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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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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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나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만 나는 다만 교활한 천사일뿐이다.” (p35~36)

 

유죄냐 무죄냐에 관계없이 오로지 의뢰인의 혐의를 벗기거나 거래를 통해 형을 감량하거나 심지어 경찰과 검찰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 사건 자체를 무너뜨리는 걸 최고의 목표로 삼는 변호사 미키 할러의 일성은 거의 궤변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법체계의 냉혹한 현실을 제대로 꼬집은 비판이기도 하고, 부끄러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하고 솔직한 자기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무실도 없이 자신이 아끼는 링컨 타운 카에서 업무를 보는 미키의 주된 고객은 돈이 되는 의뢰를 들고 오는 마약상, 폭주족, 사기꾼 등 뒷골목의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미키는 언제라도 자신의 삶의 수준을 뒤바꿔놓을 대박 의뢰인을 고대하기도 합니다. 유능하지만 그야말로 속물 변호사의 모든 미덕을 다 갖춘 인물이란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직 검사로 정의와 페어플레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매기 맥피어스(또는 마가렛 맥퍼슨)와의 결혼생활이 8년이나 이어졌던 건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가르침 가운데 미키가 절대 공감하는 한 가지는 변호사에게 가장 끔직한 의뢰인은 무고한 사람!”이란 점입니다. 의뢰인의 무고함을 깨닫는 순간 무죄판결을 이끌어내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무죄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감당해야 할 죄책감 역시 불편하고 기분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미키 앞에 고민덩어리 의뢰인이 나타납니다. 처음엔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박 의뢰인이라 반가웠지만, 알고 보니 가장 끔찍한 무고한 의뢰인이었고, 좀더 파고들어 보니 가장 악랄한 의뢰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미키는 법정에선 검사와 싸우며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지만, 법정 밖에선 의뢰인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파헤치면서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그런 와중에 소중한 동료를 잃기도 하고, 스스로 살해 위기에도 빠지는가 하면, 전처인 매기와 8살 딸 헤일리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하는 궁지에 몰립니다. 법정 스릴러와 범죄 스릴러가 절묘하게 믹스된 속물 변호사의 이야기는 막판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채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광팬이라 해리 보슈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에 열광하는 1인이지만, ‘미키 할러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미지근한 정도의 관심에 그친 게 사실인데, 앞서 읽은 시리즈 3~5(‘파기환송’, ‘다섯번째 증인’, ‘배심원단’)과 마찬가지로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역시 마이클 코넬리 특유의 재미와 매력이 덜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미키 할러의 캐릭터나 배경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기도 했고, 사건은 다소 밋밋하게 전개된 데다 법정 공방은 느슨하거나 지루했고 막판 반전의 맛과 충격도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메인 사건의 피고인이자 미키를 위기에 빠뜨리는 대박+무고+악랄 의뢰인의 캐릭터와 그가 감추고 있는 진실이 독자의 호기심을 이끌어낼 만한 파괴력을 지니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그런 탓에 클라이맥스와 엔딩의 힘이 훅 빠져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미키 할러 시리즈가운데 2편인 탄환의 심판만 못 읽은 셈인데, 이왕 첫 편을 읽었으니 조만간 탄환의 심판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순서대로 다시 읽기에 도전하는 차원에서 이미 읽은 3~5편도 다시 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번 이런저런 아쉬움을 겪긴 했어도 미키 할러의 새 작품이 나오면 절대 외면하진 못할 것 같은데, 그건 미키 할러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이클 코넬리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억측에 가깝지만, 어쩌면 정의감과 비극성을 겸비한 해리 보슈에게 익숙해진 탓에 같은 작가의 히어로지만 정반대 성격을 가진 미키 할러에게 깊은 정(?)을 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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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 사라진 릴리를 찾아서,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4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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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피어스는 분자컴퓨터 전문가이자 획기적인 생명공학 프로젝트 프로테우스를 이끄는 스타트업의 리더입니다. 심각한 일 중독 때문에 연인과 헤어진 피어스는 새로 이사한 집에서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릴리라는 매춘부를 찾는 수십 통의 전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성인 웹사이트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찾아낸 피어스는 자신이 부여받은 새 집의 전화번호가 그녀가 쓰던 번호와 똑같은 걸 알게 되는데, 문제는 그녀가 얼마 전부터 실종된 게 분명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때부터 피어스는 일면식도 없는 릴리를 찾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피어스의 어린 시절의 악몽이 사라진 릴리에게서 어른거렸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쓰던 전화번호를 부여받은 탓에 곤란함을 겪는 건 흔하진 않아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전화번호의 전 주인이 매춘부인 탓에 느끼한 남자들의 전화를 연이어 받게 된다면 그야말로 당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상식대로라면 새 전화번호를 요청하는 걸로 끝날 일이지만, 피어스가 회사의 미래가 달린 투자자 미팅을 앞둔 상태에서 사라진 릴리를 찾는데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누나와 관련된 참혹한 과거가 남긴 트라우마와 죄책감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라는 자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도 피어스는 사라진 릴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중압감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형사와 사립탐정과 변호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실종은 아마추어 탐정 피어스의 원맨쇼나 다름없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상대는 일면식도 없는 매춘부인데다 그녀를 관리하는 업체는 위험천만한 어둠의 세력이라 주먹질 하나 제대로 못할 것 같은 피어스의 행동은 그저 무모해 보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냥 손 떼는 게 좋을 것 같은데.”라는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던 그의 탐문은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단서들을 찾아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덕분에 끔찍한 폭력에 휘말리는 것은 물론 오히려 릴리를 살해한 유력 용의자로 몰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공권력이나 사법시스템과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이 중대 범죄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자칫 현실감을 잃기 쉽지만 헨리 피어스는 조금의 위화감이나 어색함 없이 산전수전 끝에 사라진 릴리의 진실에 도달합니다. 또 주인공의 배경 정도로만 그려질 것 같았던 분자컴퓨터, 나노기술, 생명공학 프로젝트 등이 자연스럽게 사건과 연결되는 설정도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피어스로 하여금 릴리를 찾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인 어린 시절 누나가 얽힌 비극적인 과거사는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진 않았습니다. 이처럼 실종은 서로 섞이기 힘든 다양한 설정과 코드들이 흥미롭게 조합된 이야기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미키 할러 시리즈의 풍미가 느껴지면서도 사뭇 결이 다른 특별한 간식이라고 할까요?

 

실종은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외톨이입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스탠드얼론 주인공들(잭 매커보이, 테리 매케일렙, 캐시 블랙)해리 보슈 시리즈에 중요한 조연이나 카메오급으로 등장하여 이른바 범 해리 보슈 패밀리로 불릴 수 있는 반면, ‘실종의 주인공 헨리 피어스는 마이클 코넬리 작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딘가 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를 꼼꼼히 읽고 크고 작은 등장인물들을 메모해놓았지만 저도 모르게 헨리 피어스라는 이름을 놓쳤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종은 꽤 여러 곳에서 해리 보슈 시리즈와 접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우선 피어스를 돕는 검사 출신 변호사 재니스 랭와이저는 해리 보슈 시리즈여러 편에서 보슈의 지원군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콘크리트 블론드의 끔찍한 매춘부 연쇄살인마 인형사가 피어스의 트라우마와 연결되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건 이 대목에서 재니스 랭와이저가 그놈을 쏘아죽인 형사를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분은 올해 은퇴했어요.”라며 해리 보슈에 대해 피어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피어스가 세상의 폭력과 혼란을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에 빗대어 언급하기도 합니다. (보슈의 어머니는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이름을 따서 보슈에게 히에로니머스 보슈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이렇게 많은 접점을 갖고 있으니 실종을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외톨이로 부르는 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헨리 피어스가 해리 보슈 시리즈가운데 어느 한 편에서라도 잠깐이나마 등장했다면 그 역시 범 해리 보슈 패밀리가 됐을 텐데 말입니다.

 

실종이 미국에서 출간된 게 2002년이니 이제 와서 새삼 헨리 피어스 시리즈가 나올 일은 없겠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어느 작품에서라도 장년이 된 헨리 피어스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척 반가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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